풍문으로 듣는 역사

3 | 조선시대의 극한직업 '암행어사'

Ka-fei 2022. 10. 3. 03:05

조선시대의 극한직업 중 하나는 바로 '암행어사'가 아니였을까 싶다.

 

 

어린 시절 암행어사는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슈퍼 히어로였다. "암행어사 출도요!"라고 외치면 수 많은 병사들이 들이닥쳐 탐관오리와 아전들을 방망이로 때리고 처벌했기 때문이다.

특히 박문수는 암행어사의 대표적인 인물로 한국인들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다.

임금의 밀명을 받아 남몰래 고을을 조사, 훌륭한 관리에겐 상을 내리고 악랄한 탐관오리는 처형하는 암행어사는 선의 상징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암행어사는 임금만이 지명할 수가 있었기에 그 존재와 목적지는 극기밀에 해당했다고 한다.

따라서 암행어사가 됐다는 것은 그만큼 임금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다만 행동규칙이 엄격해 하사받은 물품 중 하나라도 분실하거나 신분이 노출되면 바로 파직됐다고 한다.

 

어사로 임명이 되는 건 당사자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밀지를 받아 숭례문에 도착해 밀지를 열게 되면 봉서와 함이 들어있는데 그 봉서에 "도착 마을과 조사해야 할 일"들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봉서와 마패, 그리고 정확한 치수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들이 지급됐다고 한다.

봉서를 본 순간 집에도 들를 수 없고 바로 해당 고을로 떠나야하며 가족에게조차 "어사가 됐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극한직업이라 할 수 있다.

 

 

어사로 임명되면 봉서와 마패 등을 받았다고 한다. 봉서는 숭례문을 나서면서 개봉할 수 있었다고.

 

 

철저한 신분 위장, 열악한 활동비는 역효과를 부르기도

 

임금의 신뢰를 받았다고 할 수 있으니 출세길이 열렸다고 봐도 되겠지만 꼭 그건 아니였다고 한다.

드라마에서는 거렁뱅이나 양민으로 위장하는 모습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양반들인 어사들이 그렇게는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위장이 문제가 아니라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던 양민 생활이나 말투 등을 따라하기 어려웠다는 것.

어색한 활동으로 정체가 탄로나는 경우도 있어 대부분 어사들은 몰락한 양반 행세로 활동했다고 한다.

또한 활동비가 비현실적으로 적어 일부 어사들은 탐관오리와 결탁하는 등의 문제도 있었다고 알려진다.

 

가장 큰 문제는 신분 노출의 위험성에 있었다.

첫째는 바로 출도 때 쓸 병력의 사용이었다. '가'라는 고을에서 탐관오리를 처벌하려면 병력이 필요했는데 그러려면 나, 다 등 인근 고을에서 병력을 차출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 경우 암행어사가 왔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고 한다.

 

둘째는 처음보는 사람이 나타나 고을에 대해 이런 저런 정보를 캐묻고 다니다보면 눈치 빠른 자들은 암행어사가 왔음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셋째는 본인이 자신도 모르게 정체를 노출하는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임금은 젊은 관리보다는 노련한 중년 이상의 관리를 암행어사로 선발했다고 한다.

 

 

 

주로 몰락한 양반 행세하며 고을에 대해 조사했던 암행어사들

 

 

생존율이 낮다? 암행 중 사망한 경우는 극히 적어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생존율이 낮았다는 설정은 드라마를 위한 설정이라는 게 대부분의 의견이라고 한다.

암행어사는 임금이 직접 선발했으며 왕명으로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것이 임무였으므로 만약 암행어사를 사살할 경우 이는 조선의 국법상 역모죄에 해당된다. 암행어사를 공격하는 것은 임금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

역모는 삼족을 멸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암행어사의 신분을 알았더라도 쉽게 사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암행어사 임무 도중 사망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실록에도 나와 있는 사례로 보면 갑자기 사망, 설사와 구토 등의 증세를 보이다 사망하는 등 독살이 의심되거나 병을 얻어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때 임금은 어사의 시신을 정중히 한양으로 이송해 올 것과 그에 맞는 장례를 치르도록 하며 자녀가 있을 경우 훗날 벼슬에 채용하는 등 합당한 처우를 보장해주었다고 적혀있다.

 

암행어사는 문관들 위주로 대개 임명 되었다는 걸로 보아 공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만약 신변 위협이 문제였다면 무관 출신들이 더 활동하기 좋았을테니 말이다.

 

 

 

암행 중 생존율이 낮았다는 건 낭설, 실제로는 알력 싸움에서 밀려난 경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초보 어사들의 실수, 알력 다툼에서 밀려난 어사들

 

암행어사라고 무조건 승승장구 했던 건 아니다. 정조 때 암행어사 이희갑은 호남지역으로 파견되어 당시 나주목사 조시수의 비리를 알아냈지만 출도를 하지 않고 조용히 복귀했다가 정조의 호된 질책을 받고 다시 나주로 내려가 결국 조시수를 봉고파직했으나 이후 파면 당했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는 물론 고종 당시 충청도 암행을 나섰던 이건창도 정치 알력 싸움에서 밀려 곤욕을 치른 어사들이다. 정약용, 김정희, 이건창은 자신들이 파직한 관리들의 미움을 사 복귀후 귀양을 간 적이 있다.

또한 보고서를 자주 써도 문제, 너무 안 써도 문제가 됐으며 심지어 필체도 문제가 되어 징계를 받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암행어사는 심복 1명만 대동하고 다녔다? 최소 3명 이상

 

조선시대 어사 중 꽤 많은 활동 기록을 남긴 박내겸의 경우 대동하고 다니던 수행원만 12명이었고 박만정 역시 6명을 데리고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안전을 이유로 어중이 떠중이들로 구성하다 보니 정조는 이를 매우 질책하고 금지했다는 기록도 실록에 적혀있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어사들은 최소 3명의 수행원을 대동시켰고 보통 상단이나 보부상 무리에 합류해 위장을 했다고 전해진다.

 

 

1896년 고종 33년 암행어사 장석룡의 장계가 마지막 보고서로 공식적 기록이다.

 

 

| 조선의 역사와 함께 한 암행어사, 마지막 기록은 고종 33년 암행어사 장석룡의 보고서

 

암행어사는 성종 때 처음 암행어사라는 말이 등장했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인조 때부터라고 알려졌다.

348년간 총 613회의 암행어사 파견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1896년 장석룡이 암행어사 보고서를 마지막으로 올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비공식적으로는 1899년 임현섭이라는 관리를 충남어사로 임명한다는 봉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것이 진품이라면 마지막 암행어사는 임현섭이 되는 것이다.

암행어사의 상징같은 박문수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징계를 받는 것은 작은 문제이나 백성들을 구하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