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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은 이야기

사약에 얽힌 이야기

조선 시대 사약을 재현한 모습, 실제 제조법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흔히 옛 조선시대를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를 보면 종종 사약을 마시고 죽는 장면을 보곤 한다.

잘 끓인 쌍화탕처럼 보이는 사약은 말 그대로 '마시면 죽는 약'으로 알려져 사약의 '사'자가 죽을 '사'(死)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약 (賜藥).

'사'賜는 - 주다, 은혜를 내리다 -라는 뜻이며 '약'藥은 - 약, 독 -을 의미한다. 따라서 풀이하자면 "은혜를 내리는 약"이라는 뜻이 더 정확할 것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사형제도 중에 사약은 없다고 한다. 당시 사형은 목을 베는 '참수', 목을 조르는 '교수', 허리를 자르는 '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지를 찢어죽이는 '능지'만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신분이 높고 나라와 조정에 공이 있는 자는 차마 목을 자르거나 목을 조를 수 없었고 궁녀나 중전, 후궁같은 고위 신분을 지닌 아녀자의 경우 외간 남자가 신체를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났기에 비교적 육체를 보전하고 품위있게 죽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했으니 이게 바로 사약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약을 내리는 것은 오직 임금만이 내릴 수 있었으며 사약은 내의원에서 비밀리에 제조했지만 위험물질이었으므로 그 제조법이 따로 기록되어 있진 않다고 전해진다. 진짜 기록이 없던 것인지, 아니면 소실된 것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후대에 그 제조과정이 전해지지는 않고 있어 현재로서는 대략적으로 유추만 할 뿐이라 한다.

 

 

사약의 재료는 무엇이었을까?

 

제조법이 전해지지 않아 조선시대에 제조 된 사약의 주 재료를 알 수는 없다고 한다. 다만 당시 중국에서도 사약에 주로 비소,비상을 사용하였기에 조선 역시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이 있다.

더불어 투구꽃, 자리공, 초오, 게의 알, 생청, 부자 등을 섞어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특히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초오는 흔하게 나는 풀로 이것을 날로 먹거나 끓여 마시면 위장의 점막이 헐어 피를 토하며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기록도 있어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실제로 시골에서 이를 끓여드신 할머니 한 분이 사망하신 뉴스도 있었다.

 

물론 위의 독초들이 모두 먹으면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독초는 원래 약초의 일종이라 한다. 다만 이것을 정제해 몸에 이로운 것을 빼내 사용하면 약이 되고, 독으로 쓰면 독초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위 독초들 중 지금도 살충제나 각종 약 등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사약을 마시기 전 임금님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한 후 마시는 것이 예의였다.

 

 

사약을 마시면 바로 피를 토하고 죽는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사약을 마신다고 해서 바로 죽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의 시간 관계상 만들어진 허구이며 실제로는 약 15분~30분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사약이 내려지면 약사발이 담긴 소반이 놓여지고 사약을 받는 자는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한 후 사약을 마셔야 한다. 죽기 직전의 행위이니 발악을 할 법도 하지만 참수나 교수를 피하고 체면을 유지한 채 죽을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한 것이니 따지고 보면 또 당연해 보이기도 하다.

 

 

사약을 마시는 영상 속 장면, 실제 장희빈은 얌전히 사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한 잔 갖고는 안되는구나, 사약을 좀 더 내오너라.", 사약에 얽힌 일화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사약은 마신다고 바로 죽지는 않는다. 따라서 마신 후 20분 정도를 지켜봐야 하는데 때로는 사약을 마시고도 죽지 않아 적잖이 당황하게 만드는 일들도 있었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자신의 생모 폐비 윤씨의 일로 분개한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켜 피의 숙청을 자행하던 시기 영의정 윤필상은 사약을 믿지 못해 별도로 독약을 준비, 사약을 마셨으나 죽지 못하자 준비한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 전해지며 중종에게 버림받고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시게 된 정암 조광조는 사약을 마시고 죽지 않자 재차 사약을 마셨으나 그래도 죽지 못하자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금부도사 일행을 안타깝게 여겨 "방에 불을 지펴 온기로 독성을 촉진해야겠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불 지핀 방 안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부제학까지 오른 임형수는 상당히 총명하고 강직한 성품의 인물이었다.

그는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을사사화에 휘말려 제주목사로 좌천되었고 바로 파면되었다. 그리고 명종 2년 벽서사건에 휘말리면서 사약이 내려진다. 이때 임형수는 사약을 총 18잔이나 마시고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목이 졸리는 교형에 저해져 죽었다고 한다.

성리학자로 잘 알려진 우암 송시열도 사약이 듣지 않아 사약을 여러 잔 마신 후에야 죽음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간혹 사약이 듣지 않으면 목을 조르거나 어떻게서든 죽여야 했던 당시 사약 제도

 

 

바로 안 죽으면 어떡해? 어떻게든 죽여야만 했던 당시 사약 제도

 

체통과 체면이 중시되던 옛 시대에 죽음을 겸허이 받아들였으나 죽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사약을 준비해 기껏 내려간 금부도사 일행도 난감했겠지만 겸허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사약을 받았으나 죽지 못했으니 이 또한 체면이 구겨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약은 사람마다 다르게 작용되다 보니 애초 사약을 가지고 출발할 때 넉넉하게(?) 준비해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교통편이 좋지 못했던 과거에는 준비해간 사약이 다 떨어지면 이 또한 난감했기에 어떻게든 죽여야만 했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다시 사약을 가지러 한양으로 되돌아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를 수치로 여겨 스스로 자진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관행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기는 하다. 요즘은 세계적으로 사형제도 폐지가 당연시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사형제가 유지 된 국가가 별로 없지만 실제 사형이 집행 될 때에도 과거처럼 어떻게든 죽여야만 했다고 한다.

한때 "교수형에 저해졌지만 죽지 않으면 죄를 면제해준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교수형이 집행되면 발판이 내려가고 약 3분 가량을 방치하는데 이때 질식해서 사망하는 경우보다는 목뼈가 부러져 죽음에 이르는 게 대부분이라 한다. 하지만 간혹 죽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때는 더 방치해두거나 아래에서 잡아당겨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한다. 총살을 하는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실탄을 더 발사해 사형을 완수한다고 한다.

 


 

인간이 잘못을 범한 인간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사형에 처한다는 게 어찌보면 웃긴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사형제에 대해서는 반대주의이지만 그 죄의 목적, 동기에 따라 일부 중형을 범한 죄수들에겐 사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단지 격분해 밀치거나 폭행했으나 사망에 이르는 경우는 죽일 의도까진 없었으나 불의의 요인으로 그런 것이기에 그 죄와 동기에 따라 사정을 감안해 줄 필요는 있으나 오로지 이익을 위해 타인을 살해한 경우는 그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는 말이다.

 

간혹 사극을 보다가 사약을 받기 직전의 장면을 보면 과거 옛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하다.

죽을 죄를 지었지만 죽음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떨리고 무서운 일이니 말이다.

이래서 죄를 짓고 살면 안된다고 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