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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은 이야기

흥미로운 조선 2 | 조선의 몰락 원인 붕당 정치

조선의 국기(어기)와 근정전 내부의 어좌,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를 통치했던 조선.

조선의 역사는 찬란했지만 끝은 참담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조선의 멸망에 대해 "임금이 무능해서"라고 말을 하지만 그것은 역사 의식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멸망의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짊어지게 해야 하는데 그 중 가장 만만한 것이 바로 군주, 임금이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 이씨 왕조가 너무 오래 해먹어서 그런 것 "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김씨, 최씨, 박씨 등 어떤 성씨의 왕조였더라도 당시의 조선 사회를 보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1980년대 중반 청나라 말기의 사상가 양계초는 당시 조선에 대해  " 세상 물정에 어둡고 다혈질이며 말하기를 좋아하고 게으른데다 나태하다. 무엇보다 붕당이 너무 심하다. "라고 지적했다. 여기서 붕당이란 ' 당에 기대어 이익만을 쫓는 정치 '를 뜻하는데 바로 오늘 날과 비슷하다.

 

 

 

성종 이후 연산군 집권기를 거치면서 붕당은 더욱 견고해졌다.

 

 

 

 

붕당의 시작은 성종 시기, 이후 확장 된 붕당 정치

 

유교 사상이 짙은 조선 사회 뿐 아니라 대대로 봉건주의 시대에서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군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며 군주의 명을 따르는 것이 제일 첫째 덕목이던 시절이었다. 나라와 군주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이 명예였으며 가문의 위상보다 더 높은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중기인 성종 이후 붕당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산군 시절 군주의 폭정을 보다 못한 신하들이 대동단결하여 군주를 내쫓는 반정 (反正)이 일어난다. 정통성을 잃은 임금이 신하들의 주도 하에 왕위를 얻게 되면 응당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국사를 함께 하기 시작한다. 임금의 신임을 얻은 신하들이 권세를 펴기 시작하고 반대파는 숙청당하거나 유배를 보내버리는 일이 잦아진다. 이는 사실 나라 운영에 있어 좋은 현상은 아니며 권세를 잡은 무리들은 그 기세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더 다양한 일들을 꾸며댄다. 심지어 반대파들에 대한 숙청을 넘어 임금의 안위까지도 넘보게 되었으며 그래서 조선 중기 이후 임금들의 주요 목표는 왕권 강화였다.

 

인조, 효종 시기에는 각종 국난이 있어 잠시 소강 상태를 보였고 영-정조 시기에는 태평성대를 누렸다고는 하지만 이는 보여지는 면만 그럴 뿐, 사실상 군주와 신하들 간의 눈치 싸움이 극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조,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를 그려낸 영화 < 사도 >

 

 

 

 

조선 임금 중 가장 장수한, 오래 집권한 군주 영조 그리고 즉위 직전부터 암살에 노출 된 정조

 

후세에는 숙종 ~ 영조의 시기를 태평성대로 일컫기도 한다. 경종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약 100년이 넘는 세월을 아버지와 작은 아들이 나라를 통치한 셈이다. 이 시기에는 딱히 전란이 없어 태평성대로 보지만 사실 숙종 때부터 또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붕당이 영조 때에 이르러 심화됐음을 잘 알 수 있다.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 사이에서 낳은 왕자 출신이다. 이복형 경종이 왕위를 물려받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 고립이 됐던 터라 후세를 낳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 자연스럽게 왕위를 이어받게 됐다. 이때 영조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 노론이었다. 

 

어려서부터 영리했고 장희빈(경종의 어머니)의 정치적 압박 속에서 눈칫밥을 먹고 성장한 영조는 탁월한 정치 능력을 탕평책을 중심으로 정치를 펼쳤다. 탕평책은 왕도의 중립을 지킨다는 것으로 초기에는 잘 지켜냈지만 결국 영조는 며느리였던 혜경궁 홍씨의 부친인 홍봉한을 중심으로한 척신 세력을 끌어들인다. 이때 이것에 반발한 세력이 바로 심환지를 중심으로 한 청명당이었다.

 

사도세자 사후 영조는 세손이던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노력했고 설령 척신 세력들이 이를 방해해도 용납하지 않았다. 영조는 지지세력과 반대세력 사이에서 원만히 선을 넘나들며 정권을 이어갔고 그것은 주효했다.

점점 왕위가 세손(정조)에게 넘어가는 것이 지배적인 상황이 되자 풍산홍씨 가문은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풍산홍씨 가문은 정조에게는 외가가 되는데 초기에는 정조를 지지했으나 아버지 사도세자 문제로 정조는 외가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즉,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문제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정조의 동생들을 왕위로 올리려는 준비를 한다. 이후 정조가 현직 임금으로는 최초로 대놓고 암살에 노출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청명당의 심환지가 정조 독살에 주요 인물이라고 하고 사이가 안좋았다고도 하지만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300통에 달하는 서찰이 발견되면서 그 논란은 다소 해소되었었다.

물론 정조와 심환지가 사이가 좋았는지, 아니면 정조가 심환지를 회유하기 위해 전략을 썼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찰의 내용이 크게 안부, 평소 고민, 위로, 다른 신하들의 뒷담화, 그리고 서찰에 대한 보안을 지시한 것을 보면 딱히 사이가 나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헌종이 후대를 잇지 못하고 단명하자 조선 왕실은 그야말로 족보가 제대로 꼬이기 시작한다.

그 동안 부자간, 형제간, 숙질간 등 가까운 사이에서 유지되던 왕위가 7촌이 넘어가는 등 꼬이기 시작하는데 이때 판을 친 것이 바로 세도가들이고 이때부터 왕권은 유명무실해진다.

그리고 영화의 소재로도 잘 알려진 실화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로 인해 조선 왕조는 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