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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은 이야기

흥미로운 조선 6 | 조선왕조 500년, 조선왕조가 멸망한 이유

조선 후기 26대 임금 고종과 27대 임슨 순종의 사진

 

 

 

 

어느 왕조나 멸망하기 이전에는 반드시 망국( 亡國)의 전조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왕조가 생기고 멸망하는 것이야 세상의 이치이니 크게 이상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한 지역을 다스렸던 국가가 망한다는 건 꽤나 씁쓸한 일이다. 특히 조선의 멸망은 더욱 그러하다.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건국해 1910년까지 약 518년 동안 이어져 온 우리나라의 전신이다.

흔히 대한제국이 있었고 고종황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상 국뽕적인 주장이며 사실상 대한민국 이전의 국가를  조선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조선의 역사를 518년이라고 하는 것이고 말이다.

 

영화 < 명당 >을 보면 '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 라는 말이 나온다.

흔히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1대 임금을 지내고 2대 순종황제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엄밀히 따져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 는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임금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에 있어 망국의 기운이 제대로 뻗치기 시작한 건 1800년이다.

물론 이미 어느 정도 전조 현상이 있긴 했으나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안동김씨의 시대가 시작 된 것이다.

 

 

※ 특정 가문을 비방, 폄하 할 의도가 아님을 밝힙니다.

 

 

 

왕권 추락, 세도 정치의 시작

 

조선후기 세도가문으로 권세를 누린 양대가문이 있었다.

 

 

 

조선의 임금들은 외척을 경계하는데 진심이었다. 여기서 외척이란 어머니 집안을 이야기하는데 왕실은 전주 이씨 가문이니 친가로 볼 수 있고 외척은 중전의 가문이니 외척이 되는 것이다. 외척이 나쁜 뜻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집안에서 중전을 배출한다는 것은 권력을 잡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후사를 이을 왕자를 낳은 어머니이기 때문에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막강한 권력을 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조선 후기 권력의 양대산맥은 풍양 조씨 가문과 안동 김씨 가문이었다.

그러나 1846년부터 풍양 조씨는 서서히 권력을 잃었고 안동 김씨가 권력의 핵심으로 우뚝 서게 됐다.

특정 가문이 전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조선 왕실에게도, 백성들에게도 달가운 일은 아니였다. 대부분 권세가들이 그러하듯 나라의 안위보다는 가문의 영위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정통성을 유지하던 왕실은 24대 헌종을 끝으로 그 명맥이 끊어졌고 조선의 멸망을 의미했다.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문이라고 해도 왕위를 넘볼 수는 없었고 어떻게든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에 따라 꼭두각시 임금이 필요했다. 그렇게 찾아낸 임금이 바로 방계 중 방계인 철종이었다.

흔히 강화도령이라 부르는 임금이다.

 

오래 전 역모죄에 휘말려 가문이 멸문되다시피한 철종이 국사를 제대로 돌볼리 없었다. 제왕 교육은 물론 궁궐 내에서 철종에게 힘을 실어 줄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중전만이 철종을 극진히 따른다.

바로 우리가 드라마로도 익히 알고 있는 철인왕후이다.

제 아무리 임금이라도 마음에 안들면 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안동김씨였지만 철종에게는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철인왕후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철인왕후 역시 안동김씨 출신이지만 그녀는 철저히 가문과 왕실의 일을 구분지어 간섭을 못하도록 막아주었다고 한다.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조선, 서양 열강에게 치욕을 당하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로 조선군은 외국군대에게 처참히 짓밟힌다.

 

 

 

 

우리 민족은 외국과는 달리 정복 전쟁을 유난히도 하지 않았던 민족이다.

고려나 조선 시대 초 왜구를 혼내주기 위한 전쟁은 있었으나 그 후로는 침략보다는 침입을 당하는 편이었다.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청나라에 의지하고 개방의 문을 닫는 쇄국정책을 추진한다.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조선 왕실은 또 한번 난리가 나는데 안동김씨 가문에 신물을 느낀 왕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흥선군 이하응과 결탁, 이하응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리니 이가 바로 26대 임금 고종이다.

 

흥선군은 유일하게 생존한 임금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오르니 우리가 흔하게 부르는 흥선대원군이다.

임금이 어리면 왕실 어른이 직접 수렴청정을 해줬지만 이때에는 흥선대원군이 아들을 대신해 권력을 장악하는데 이미 국제정세를 파악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도 있긴 했지만 사실 조선은 이때만 해도 서양 문물에 대해 크게 거부감을 갖진 않았다.

문제는 천주교 등 종교에 있었다.

 

1866년 프랑스군과의 병인양요, 1871년 미국과의 신미양요로 조선군은 서양 열강군대의 화력을 직접 체험한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깨닫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이미 믿고 있던 청나라 역시 1840년, 1856년 두 차례의 아편전쟁으로 영국에게 처참히 발린 후였다.

그나마 신식군대를 개편해보지만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아 훈련도 제대로 안되었고 전쟁 경험 부족, 낙후 된 무기 등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1903년 수도 서울 광화문 앞 육조거리

 

 

 

 

조선의 멸망은 임금의 무능이 아닌 세도정치와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탓

 

많은 분들이 조선의 멸망을 이씨 왕조의 무능, 고종의 무능을 꼽고 있지만 이것은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사실상 백성신분이던 신하가 아닌 그저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남탓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절대권력을 지닌 조선시대의 임금이라 해도 반정을 통해 하루살이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게 바로 임금의 자리이다.

하물며 오랜 세월 가문의 핏줄이 끊겼고 더 이상 정통성을 잃은 임금이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제대로 세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임금의 귀와 눈을 막은 당시 세도정치 가문들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까.

오히려 군주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은 죄가 있다고 보진 않는가 말이다.

 

우리가 을사오적을 비난하고 경멸하는 이유는 군주를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먹는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이미 신하들 대다수가 일본의 편에 선 마당에 임금 혼자서 어떻게 대처할 수 있었을지를 생각한다면 고종이 무능했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 참고로 저 전주이씨 아닙니다. )

 

더불어 당시 세도가문 탓만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문의 영위를 위해 노력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 선조들은 청나라를 너무 믿었던 게 결국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놈의 사대의 예가 무엇이라고....

가끔 궁궐에 가면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헌종은 무슨 생각을 했고 철종은 뜰을 거닐며 조선의 미래에 대한 어떤 걱정을 했고 고종과 순종은 망한 나라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말이다.

 

만약 조선이 일제 강점기를 겪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여전히 경복궁에 거주하는 임금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영국이나 일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