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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은 이야기

흥미로운 조선 8 | 성범죄자 처벌에 진심이던 조선의 법

조선 후기 ~ 일제 강점기 시대의 조선 형벌 집행과 감옥의 모습

 

 

 

 

사람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다보면 온갖 분쟁이 발생되는 건 동서고금의 이치이다.

제각기 생각이 다르다 보니 자연스레 이익이나 어떤 목적을 위해 남을 해하거나 상해를 입히고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범죄자 무리들이 생겨나곤 한다. 임금 1인 천하같은 조선시대에도 엄연히 국법이 존재했고 이 법률에 따라 형벌을 정하고 다스렸다고 한다. 

 

흔히들 조선 시대하면 양반, 특히 남성들 위주의 삶이라고 단정짓는 분들이 많지만 의외로 조선시대는 여성 위주의 모계 중심 사회기도 했으며 여성 보호와 권리에 진심이었던 면을 많이 가지고 있기도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각색 된 장면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왜곡 된 인식이 생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조선시대에도 잘못의 정도에 따라, 가해자의 신분과 나이에 따라, 죄목에 따라 그 형벌이 각기 달랐다고 하는데 아무리 잘못을 했다고 해도 중범죄가 아닌 이상 70세 이상의 노인, 어린이, 임산부는 그 처벌을 감하는 대신 벌금형에 처했다는 기록도 있다. 단, 처벌을 함에 있어서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조선시대지만 특히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는 더 엄격하게 처벌을 적용했다고 하는데 오늘은 조선의 성범죄 처벌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성범죄를 저지르면 일단 X됐다고 봐야 했던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부녀자 성범죄에 대해서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 l 드라마 '추노'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과학수사나 DNA 분석기법, CCTV 등이 없었기 때문에 " 범죄를 저질러도 증거만 잘 없애면 완전 범죄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 하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또한 남존여비 사상이 짙었고 철저한 양반 중심의 질서였으니 " 부녀자를 마음대로 추행, 강간해도 양반이면 봐주지 않았을까? " 하는 생각도 해보았을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성범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긴 사람이 모여 사는 집단 사회에서 강도, 강간 등 강력 범죄가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직업 중 가장 오래 된 직업이 군인과 창녀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METOO 운동과 사회인식이 많이 개선돼 성범죄 피해를 적극적으로 알리기도 하고 처벌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지만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성범죄에 있어 매우 소극적이었다.

심지어 " 여자가 행실을 똑바로 하고 다니지 않았으니 그런 일을 당하지. 뭐 자랑할 일이라고 동네방네 떠들어! " 라며 손가락질을 하고 쉬쉬했다고 하니 얼마나 소극적이었는지 알만 하다.

 

조선시대에는 CCTV나 증거 확보가 쉽지 않았고 여성의 행실 지적 문화 때문에 쉬쉬해서 그렇지, 성범죄가 적발된다면 어중간한 양반이라도 무사하지 못했다는 것이 바로 조신시대의 형법이라고 하니 어쩌면 지금의 성범죄 처벌은 여전히 솜방망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1. 부녀자를 강간한 자는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

 

일단 강도강간이든 근친상간이든 강간에 대해서는 자비가 없었다고 한다. 100% 사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형은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이 대부분이었으나 12세 미만의 여성을 강간한 경우, 강도강간, 근친상간의 경우에는 참수형에 처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실제 1398년 윤 5월 16일자 태조실록에 보면 " 11세 소녀를 강간한 사노 잉읍금을 교수형에 처했다. "라는 기록이 있다. 

 

 

 

2. 강간 미수에 그쳤더라도 장형 100대와 3천리 밖으로 유배하도록 하라.

 

지금으로 치면 준강간인 미수범에 대해서도 조선사회는 자비가 없었다고 한다. 장형은 죄인을 형틀에 묶고 둔부(엉덩이와 허벅지 등)를 내리게 한 후, 굵은 나무 막대로 내려치는 형벌이다. 흔했던 태형보다 더 무거운 형벌로 장형 100대를 맞고 살아남기는 어렵다고 한다. 혹 운이 좋아 살아남아도 그 상처 후유증으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바로 죽이지 않았으니 사형이라고 볼 순 없지만 끝내 사망에 이르게 만들었으니 사실상 사형에 가까운 처벌이다.

 

 

 

18세기 조선화가 신윤복의  청금상련(廳琴賞蓮)

 

 

 

3. 공직에 있는 자가 성범죄를 저지르면 엄히 문책하라.

 

조선 사회는 양반 중심의 질서 체계였기 때문에 양반이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라의 녹을 받는 관리가 성범죄를 저지를 경우 엄하게 다스렸다고 한다. 군수를 지낸 한 관리는 민가의 부녀자를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쳤지만 양반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노비로 강등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조선 세종 20년 8월에는 성균관 유생 두 명이 지나가던 부녀자를 덮친 사건이 있었다.

 

이에 몸종이 이를 고발했고 사헌부가 진상조사에 나섰다. 정진석, 최한경이라는 유생들은 " 단지 희롱했을 뿐이었다. " 라고 인정했고 몸종의 진술이 오락가락하여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진 못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사헌부는 " 몸종이 사대부를 상대로 진술을 쉽게 할 수 없는 점, 피해를 본 부녀자가 비첩( 노비였으나 주인의 첩으로 오른 여성 )의 신분이라 억울함을 당할까 진술을 번복한 점 등을 보면 그 죄질이 가히 낮다고는 할 수 없다. "라고 판단하여 장형 80대를 선고했다고 한다. 이에 세종은 " 강간 미수로 그쳤을 것 같진 않다. "는 이유로 재조사를 지시했고 애초대로라면 장형 100대와 유배형을 내리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진술의 번복, 그리고 증거가 명확하지 않았기에 형량을 조금 낮춰 보고한 것이라 한다. 

당시 정신석은 그 가담 행위가 낮아 태형 40대를, 최한경은 장 80대를 받았다고 하며 세종도 이를 승인했다고 한다.

 

 

 

 

 

 

 

 

4. 성범죄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거나 죄를 축소한 관리는 장형에 처한다.

 

보통 큰 고을에는 관아가 있었고 이 곳의 수령이 마을의 모든 일을 처리했다. 또한 재판이나 송사도 모두 수령이 직접 사실을 조사해 판결을 내려주었다. 지금으로 치면 구청장과 같지만 모든 일을 관장한다는 것이 다르긴 하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3년에 따르면 상주목사 구치명, 판관 김언신은 성범죄 사건을 화간(합의 하에 이루어진 성관계)으로 처리해주는 조건으로 금품을 받고 이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으며 범죄자를 구금하지 않아 도주하게 만든 죄까지 포함해 장형 100대와 90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5. 피해 여성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도록 하라.

 

조선시대 여인들은 대부분 은장도라는 작은 칼을 지녔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누구나 가지고 다니진 않았다고 한다.

이 은장도의 역할로 잘못 알려진 것이 ' 정조를 잃은 여인이 은장도로 자결한다. '라고 알려졌으나 실은 호신용이었다고 한다. 조선 사회는 피해 여성의 신분에 관계없이 강간을 시도한 자에게 상해를 입혔을 경우 정당방위를 인정해주었다.

설령 웃음과 몸을 파는 기녀라고 할지라도 동의없이 성관계가 이루어졌다면 이를 강간으로 간주했고 혹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하여도 형량에는 그것을 참작하지 않았다고 한다.

 

1429년 11월 27일 세종실록을 보면 " 칠원(지금의 함안)에 사는 정경이라는 사람이 동네 처녀 연이를 강간하고자 밤새 폭행했다. 이에 연이라는 처녀가 저항 끝에 사망했다. 정경은 교수형에 처하고 연이는 정려문(旌閭門) 세워 정절을 표창하도록 하소서 " 라는 장괘가 올라왔다고 한다.

 

 

 

18세기 조선화가 신윤복의 월야밀회(月夜密會 )

 

 

 

6. 국가의 행사로 인해 대사면령을 반포해도 성범죄자는 제외한다.

 

조선은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기념을 할만한 행사가 있을 때면 임금의 명으로 사면령이 실행됐다.

하지만 그 어떤 경축 행사를 한다고 해도 사면에서 제외되는 범죄자들이 있었는데 ' 역모, 가족 살해, 강간범 '은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한다는 규정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원칙이 예외됐던 일화가 있다. 성종 12년 처삼촌의 조카딸을 강간한 최습이라는 사람이 대사면령에 포함돼 사면된 것이다. 이에 사헌부 정4품의 이감이라는 신하가 상소를 올려 이의를 제기했다.

삼강오륜에 위반되는 죄이기 때문에 사면에 포함된 것이 옳지 못하다는 내용이었고 성종은 이를 보고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시인, 최습의 일가를 모두 변방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당시 조선의 변방은 척박한 기후와 토지로 인해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지역이었기에 꽤나 중한 처벌에 속했다.

 

 

 

7. 아무리 대명의 군사라 할지라도 성범죄는 나쁜 것이다.

 

선조 31년인 1598년은 임진왜란이 있던 시기였다. 당시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가 올라왔다.

" 명나라 군사들이 마을에 출입하면서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했으며 심지어 어린 소녀들까지 강간을 당했다 합니다. " 라는 보고였다. 이에 조선은 항의했고 유정 제독은 " 당장 그들을 잡아들여라. " 라고 지시, 죄질이 나쁘다 하여 효수형에 저했다고 한다.

 

당시 명나라를 우대하는 분위기와 지원군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형법으로 다스리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범죄는 엄연히 범죄, 아무리 대명제국의 군사라 할지라도 조선 내에서 성범죄를 저지르는 걸 묵인하지 않았다.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양주관아지의 모습

 

 

 

물론 조선 시대에서 성범죄자들을 엄중히 다스렸다고 해서 꼭 살기 좋았다고 또한 남여가 공평했다고 할 수도 없다.

혹자들은 불륜을 저지름에 있어 남성에겐 관대하고 여성에겐 엄격했다는 점을 들어 조선 사회가 부당했다고 어필하고 있으나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여성의 정절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음을 볼 때 그것을 문제로 모든 것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전쟁, 질병으로 인한 사망 등 또는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알던 조선이었기에 남성의 여자 문제에 대해서 관대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서까지 관대하진 않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만 하다.

조선 후기에는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를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술시 ( 戌時 : 밤 7시 ~ 9시 ) 이후에 남성들의 외부 출입을 자제하는 풍토도 생겼다고 하니 얼마나 여성 보호에 진심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래도 나름 성범죄 근절을 위해 노력했던 조선시대의 성범죄 처벌에 대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