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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은 이야기

흥미로운 조선 9 | 약으로 생각했던 조선의 담배

우리나라에는 호랑이가 담배피고 놀던 시절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담배.

요즘에는 백해무익, 간접흡연의 폐단, 냄새 등으로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아졌지만 과거에는 실내 뿐 아니라 비행기, 버스 내에서도 흡연이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담배의 역사는 과거 고대 마야인들이 피우기 시작했다고 알려졌지만 지금의 담배로 발전되기 시작한 계기는 1492년 콤롬버스가 신대륙이던 아메리카를 발견, 원주민들이 ' 타바코 '라는 긴 대롱에 말린 풀잎을 넣고 피우는 걸 보고 담배종자를 유럽으로 가져가면서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원래 담배는 기호품이 아닌 의약품처럼 여겨졌고 실제로 당시 여러 질환에 담배잎을 활용해 치료를 했기에 유행이 되진 않았으나 1560년 포르투칼의 장 니코라는 사람이 이를 보고 담배종자를 가지고 프랑스로 가면서 유행이 되기 시작한다.

담배 성분 니코틴은 바로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담배는 언제 국내에 들어왔을까.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임진왜란 당시에 유입됐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혹자들은 전란 중에, 또 일부는 전란직후에 들어왔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역사서에 기록 된 시기가 1616 ~ 1617년이니 임진왜란 직후에 들어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인조실록을 보면 인조 16년인 1638년 8월 4일 내용에 " 16년 ~ 17년쯤 들어와 22년 이후부터 대부분 피우기 시작하니 이제는 객이 방문을 해도 술이나 차 대신 담배를 권한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614년 이수광의 지봉유설( 芝峯類說 )을 보면 이미 이전에 담배가 왜구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 지봉유설은 지금으로 치면 사전, 백과사전같은 서적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이수광에 따르면 이 담배잎을 요상한 풀로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약초로 보는 시각과 사람에게 해로움을 준다는 시각이 공존해 있음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 초기나 그 이전에 조선에 유입된 것이 아닐까 싶은데 그 근거는 바로 광해군이 담배를 싫어했던 군주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그 이전에, 인조실록에는 1617년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처음에는 담바고(談婆姑) 라고 불렀으나 선비나 양반들은 ' 남쪽에서 온 풀 '이라는 뜻으로 ' 남초(南草), 남령초(南靈草) ' 라고 불렀고 일반 백성들은 담파고, 담박괴, 담바 등으로 부르다가 이것이 시대를 거쳐 담배라는 표준어 명칭이 됐다고 한다.

 

또한 당시 조선에서도 담배를 약초로 치료에 활용하는 한편 만병통치약이라는 인식이 생겨 대중화가 더 빨리 이루어졌다고 한다. 물론 가격이 고가였기 때문에 돈이 많은 양반들이 주로 담배를 피웠으며 일반 백성들은 쉽게 피우기 어려웠다고 하는데 가격이 비싼만큼 벼농사 대신 담배농사를 짓는 농가가 늘어나게 되었고 담배 보급율이 증가되자 점차 가격이 안정되면서 일반 백성들도 피울 수 있게 됐다고 전한다.

이 당시 조선의 담배잎이 얼마나 품질이 좋았으면 명나라에서 조선의 담배를 수입, 또는 공물이나 뇌물로 받아갔을 정도라고 하니 정말 농사, 재배에는 기가 막혔던 우리네 조상들이 아닐까 한다. 

 

 

 

 

담배에 진심이었던 조선의 군주들, 광해와 정조

 

담배를 싫어했던 왕 제 15대 군주 광해군 vs  담배를 권장했던 왕 제 22대 군주 정조

 

 

 

 

담배가 조선 사회에 일종의 팬데믹처럼 큰 유행처럼 번졌다. 워낙 약초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보니 담배에 대한 예절이 생기기 전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녀노소할 것없이 담배를 피웠으며 신하가 임금 앞에서 담배를 물고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 15대 군주 광해군은 담배를 질색했다고 하는데 광해군 일기를 보면 " 동래왜관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80칸이 모두 소실됐다. 왜인들이 담배를 즐겨 피워 담뱃불로 화재가 발생한 듯 하다. 임술년 (1622년)에도 화재가 발생했었다. " 라고 1623년 2월 15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인조반정은 1623년 4월의 일이다.

그러다 보니 광해군은 담배라면 아주 질색을 했는데 대전 내에 신하들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로 자욱한 일이 자주 있다 보니 광해군이 " 앞으로 내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말도록 하라. "라는 어명을 내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금연가였던 광해군과는 달리 담배를 사랑했던 군주도 있다. 바로 22대 군주 정조였다.

정조는 심신을 편안하게 한다는 이유로 상당히 담배를 자주 피웠던 임금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실제로 신하들이 벼농사 대신 담배농사를 짓는 백성들이 늘었다며 이를 규제하자 주청하였으나 정조는 " 담배가 남방의 나라에서 처음 나왔다고 하나 실은 서양에서 유래 된 것이다. 서방의 문물이 점차 청나라에서 행해지고 있으니 이는 서방의 풍기가 늦게 열리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백성들이 제사를 준비할 때 담배를 물고 음식을 장만하다 보니 이를 제사 때에는 금연을 하는 풍속이 퍼졌는데 금단현상으로 인한 폐해가 속출하자 정조는 " 제사와 담배는 무관하니 제사 전에 담배를 피울 수 있게 하라. "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 

 

 

 

 

 

 

 

 

담배에 대해 장점과 단점을 지적한 실학자, 지금의 담배와 똑같다.

 

1681년 태어나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 선생은 우리에게  성호사설(星湖僿說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익은 조선에 널리 퍼진 담배에 대해 장점과 단점을 지적한 인물로도 유명한데 물론 의학이 덜 발달 된 조선시대였기에 지금의 상식과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는 장점으로 " 수명을 연장케하고 담(가래)를 없애주며 종기나 상처에 특효가 있다. 소화불량이나 통증 완화에 도움을 주며 만음의 긴장을 해소한다. 더불어 사람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라고 적고 있다.

 

반면 해로움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적었는데 " 정신을 맑지 못하게 하며 눈과 귀에 총기를 사라지게 한다. 안색을 흐리게 하며 치아가 빨리 상해 빠지게 만든다. 신체가 약해지고 구취가 심해진다. 무엇보다 부질없이 돈을 낭비케 한다. "라고 적기도 했다. 아마 당시에는 약초로 여러 치료에 널리 담뱃잎이 활용되다 보니 생명을 연장시킨다고 본 듯 하다.

지금봐도 당시 담배의 효과와 단점이 지금 보는 시각과 비슷한 걸 보면 조선 시대에 담배를 얼마나 피웠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23대 군주 순조 역시 " 요즘은 젖만 떼면 아이들도 담배를 피운다. " 라고 했으니 당시 조선 사회에서 담배에 대한 인식과 보급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한다.

 

 

 

 

양반 옆에 연동이 서서 장죽을 들고 있는 모습

 

 

 

 

담배를 피고 안 피우고는 자유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오늘은 조선시대의 담배에 대해 알아보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담배를 처음엔 약초로 알았다니 참 신기하다.

담배는 백해무익하다고 하지만 세계적으로 장수하신 분들 중에서도 오랜 시간 흡연을 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담배를 피웠다고 해서 꼭 일찍 죽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뭐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체질이 다를 수도 있고.

이유야 어떻든 담배를 피우고 안 피우고는 개개인의 자유이다.

단, 자유라고는 해도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잘못 된 행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