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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슈

어재연 장군 수자기, 힘없는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훈

조선은 찬란한 문화 유산도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침울한 역사를 간직하기도 했다.

 

 

조선의 역사도 바로 현재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많은 문화재와 찬란한 유산들이 있는 조선이지만 그와 반대로 침략과 약탈, 강제점령의 수모를 겪은 비운의 역사를 간직하기도 했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 한국사를 정말 잘했다.

일찍이 부모님이 만화책으로 된 역사 서적을 사주었고 그 책은 정확히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고조선 시기부터 대한제국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의 역사를 만화로 정리한 책이었다.

 

정말 그 어떤 책보다 많이 읽었고 보고 또 보고를 반복했더니 딱히 수업을 듣지 않고 시험을 봐도 늘 1등을 할 정도로 한국사를 잘했었다.

 

많은 분들이 조선 말기의 일제 강점기를 두고 "왕실의 무능, 임금의 무능"으로 치부를 하지만 나는 그 생각에 반대한다. 그리고 그런 발상이야 말로 자국의 역사도 모르는 채, 그저 책임과 탓을 돌리고 싶어하는 잘못 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조선은 순조 이후 쇄국의 길로 접어든 상태였다. 굳이 더 따진다면 영조 때부터 흔들림이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금씩 흔들리던 왕권은 순조 이후 완전히 몰락한다.

임금은 더 이상 군주가 아닌 상징적인 존재였고 오로지 붕당과 세도정치가 조선을 장악했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무능과 나약함은 일제가 만든 허구이다. 나라와 임금이 무능하니 우리가 도와준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전략임에도 지금 많은 사람들은 그걸 진실로 믿고 있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힘없는 나라의 설움, 신미양요 ( 1871년 6월 1일 ~ 1871년 6월 11일에 벌어진 미국과의 전투 )

 

1871년 승전을 기념하는 미군의 모습. 좌측은 콜로라도호에서 장군기를 포획한 후 촬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통상을 요구해오던 제네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 일대에서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침몰한다. 물론 당시 조선은 미군 함정을 정중히 돌려보내는 등의 평화적 행위를 했었지만 철수를 조건으로 상당한 공물을 요구한 제네럴호는 결국 조선 수군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이 사건을 원래 미군은 몰랐지만 당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로 조선천주교인들이 미군으로 이를 알려 미국이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5년 후 미군은 이를 빌미로 재차 조선으로 진군한다.

하지만 이미 조선은 쇄국정책을 견고히 하고 있던 시기로 통상을 거절하고 이에 미군의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함정들이 일제히 침공을 시도한다.

 

당시 전투는 격렬했다고 알려진다. 화포와 화승총으로 무장 된 조선 수군, 그리고 최신식 소총과 단도, 대포로 무장 된 미군. 재래식 무기와 최신식 무기의 차이도 차이지만 미군과 조선 수군의 전투에 대한 감각도 차원이 달랐다.

이미 독립전쟁, 남북전쟁 등으로 수 차례 전투를 경험한 미군과 딱히 전투 실전 경험이 없던 조선군은 확실히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강화도가 함락된다. 승전을 한 미군은 여러 문화 유물을 승전 전리품으로 약탈해갔다. 이때 당시 광성보를 지휘하던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수자기)도 뜯겨져 약탈됐다. 기록에 따르면 10명 정도의 사상자를 나타낸 미군과는 달리 조선 수군은 약 350명 정도가 전사하거나 크게 다쳤다고 한다.

그럼에도 조선군은 용맹했다고 당시 참전했던 슐레이 소령은 회고했고 워싱턴 포스트 역시 당시의 참상을 실었다.

 

"그들은 이렇다 할 무기없이도 맨 손으로 용맹하게 우리에게 대적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용맹하게 맞서는 적군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 슐레이 소령

 

" 승리는 승리였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무의미한 승리였다. " - 워싱턴 포스트

 

 

어재연 장군의 초상화, 그리고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장군의 생가 모습

 

 

" 군인이 물러서는 것은 조국에 대한 불충이다. " 어재연 장군과 수군의 목숨을 건 사투

 

어재연 장군은 1823년 태어났다. 자는 성우, 본관은 함종으로 1866년 회령 부사 등을 지냈고 그 해 병인양요(프랑스와의 전투)가 발발하자 선봉장이 되어 광성진을 수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871년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궁궐에서는 장군을 다시 광성진을 수호하라고 급파하고 이에 동생 어재순과 함께 격렬히 미군과 맞서다 전사한다. 물론 사후 장군은 그 숭고한 호국 정신을 인정받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장군의 생가는 경기 이천시 율면 일생로897번길 22-47에 있다. 원래는 어재연 장군 생가로 지칭됐으나 2017년 존칭인 장군이 제외되고 어재연 고택으로 명시된다. ( 왜 이렇게 하는지 의문... )

 

 

어재연 장군의 실제 친필 문서, 박물관에 임대 소장 된 어재연 장군기(수자기)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는 2007년 미국과의 협의 끝에 장기 임대 방식으로 13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물론 초기에는 반환 해줄 것을 미국에 요청했지만 미국은 승전 전리품에 대한 관리법을 근거로 이를 거절한다. 다만 임대 방식으로는 가능하다는 답변을 주었고 이에 현재 매년 2년 단위로 임대 계약을 연장하고 있지만 연장할 때마다 많은 고충이 있다고 한다. 자국의 문화유물도 하소연을 해야 하는 현실이 참 씁쓸하다.

현재 장군기 진품은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존 중이고 본따 제작한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강화도에 위치한 광성보, 그리고 당시에 사용했던 실제 화포가 전시되어 있다.

 

 

힘없는 나라가 말로만 평화와 자주를 외칠 때 당하는 수모, 아직도 우리는 모르는 듯 하다

 

한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외세의 침략은 많았으나 정작 우리가 침략한 사례는 극히 드물 정도이다. 그나마 삼국 시대에는 전쟁이 종종 발발했지만 고려 시대부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모두가 침략을 당한 전쟁이었다.

전쟁은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건 약소국의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고 본다. 오늘의 미국이 탄생 된 배경, 그리고 중국이 그토록 외세에 침략을 당하고 영토를 강제로 임대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음에도 반환받는 것은 모두 국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국력은 외교력도 있겠지만 전쟁을 치를 힘이 있음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따지고 보면 모두 말로만 평화를 외쳤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혼란스러워 한다, 백성들이 힘겨워 한다는 이유로 안일한 대응을 지속했기 때문에 오히려 백성들도 힘들어졌고 나라는 흔들렸다.

 

영토를 뺏기고 문화재를 약탈당했음에도 아무 소리를 못하는 것 역시 국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만주 벌판은 이미 되찾기 틀렸고 독도와 동해를 둘러싼 일본과의 말장난은 여전하다. 어디 그뿐일까.

북한과의 통일, 종전 협상조차 외국이 인정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이 현실에서 과연 무엇이 자주 독립이라는 것인지 의문이다. 전쟁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맞겠지만 싸울 때는 싸워야 나라의 안위도, 평화도 오는 게 아닐런지.

 

오늘은 강화도나 한번 다녀와야겠다. 어릴 때는 종종 갔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