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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은 이야기

흥미로운 조선 11 | 조선 시대인들 집값이 쌌을까...

조선 후기 서울의 모습

 

 

 

 

요즘은 집값 때문에 결혼도 포기한 시대라고들 한다. 많은 분들이 " 지금부터 월급모아도 집을 못 산다. "라고 불만을 표출하지만 그건 당연한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모으면 당연히 집을 못산다. 예전부터 모았어야지...

집값은 외국도 비싸고 우리나라도 비싸고 옛날에도 비쌌다. 요즘에만, 우리나라만 비싼 게 아니라는 말이다.

즐길 것 다 즐기고 놀 것 다 놀고 남는 돈 저축해봐야 집을 사기는 어렵다.

 

물론 월급을 오래 전부터 모아도 집을 대출없이 사긴 어렵지만 돈 차곡차곡 모아 대출없이, 부모님 도움없이 집을 사는 경우도 있다. 서울의 브랜드 아파트, 큰 평수만 고집을 하니 집을 사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예전 조선 시대에는 집값이 쌌을까? 오늘은 조선시대 주택 가격에 대해 알아보겠다.

 

 

 

 

조선시대의 물가는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고 한다.

 

 

 

 

그 전에 먼저 조선시대의 물가, 즉 돈의 가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는 대개 소위 엽전이라는 화폐를 이용했는데 그 단위는 푼 >> 전 >> 냥이었다. 10푼이 1전이 되고 10전이 1냥이었으니 1냥이라고 하면 엽전 100개를 의미한다. 대부분 사극에서는 편의상 냥으로 통일해 사용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1냥의 가치를 굉장히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1냥을 현재 가치로 환산했을 때의 이야기는 다양하다. 당시 쌀의 가격을 토대로 현재로 환산해보면 일각에서는 10만원 이상을 이야기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최소 7만원을 1냥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1700년대 서울에 살았던 선비 유만주의 일기를 보면 당시 집값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다.

 

 

 

 

집값은 조선시대에도 비쌌다.

 

우리나라의 과거 주택을 보면 보통 초가집과 기와집으로 나뉜다. 초가집은 주로 천민, 평민들이 거주했고 기와집은 양반가문, 거상들이 주로 살았다고 한다. 

2020년 공개 된 조선시대 한 사료에 따르면 서울의 중심 번화가였던 지역의 29칸 기와집 가격이 480냥으로 당시 서울의 타 지역에 비해 최소 3배 이상 비싸게 거래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으로 치면 강남, 강복 뭐 그런 지역적 차이인가 보다.

또한 1777년에는 275냥을 하던 민가가 1798년에는 500냥으로 약 2배가 뛰었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여기서 민가라고 함은 그냥 일반 초가집을 의미한다.

 

 

 

 

500년이 넘는 옛 가옥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경주 양동마을

 

 

 

 

1700년대 조선 서울에서 살았던 유만주라는 선비가 남긴 일기 '흠영'을 보면 당시 집값에 대해 자세히 나와있다.

기계 유씨가문이던 그는 당시 서울에서도 알아주던 명문가문의 후손으로 옥류동(현재 종로구)에 살다가 자손이 늘어나면서 남촌(남대문 일대)으로 이주를 했다고 한다. 초가집에서 살던 그는 현재의 명동 부근에 100칸짜리 집을 당시 2,000냥에 구입했다고 적었다. 1784년 9월 30일자에 적힌 일기를 보면 " 일생을 편히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재산 "이라고 적었다.

 

일기에 적힌 당시 물가를 보면 쌀 3되가 10푼이었다. 이를 이용해 현재 가치로 계산하면 2,000냥은 약 1억 2천만원이 된다.

물론 이는 현재 20kg의 쌀값을 평균 5만원으로 가정하고 계산한 금액이다. 당시 유만주의 식구들이 먹는 쌀로만 계산해도 25년치에 해당한다고 한다. 쌀값만 25년치이니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이를 고려하면 20년은 족히 돈을 안쓰고 모아야 집을 살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일기를 보면 당시 서울의 가장 핫한 지역의 집값을 엿볼 수도 있다. 당대 사대부 중 가장 부유하다는 이은이라는 사람의 집은 380칸의 기와인데 가격이 무려 2만냥 이상이라고 적혀있다. 유만주의 집이 2,000냥인데 이은의 집은 2만냥 이상이니 최소 10배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현재로 치면 15억원 정도가 된다는 뜻이다.

지금의 돈으로 보면 명동 일대가 15억이라니 저렴하게 느껴지겠지만 당시 쌀이 주식이자 주요 거래수단이던 것을 고려하면 지금과 비슷한 가격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당시 일대를 현재의 아파트로 계산하면 이은의 집은 130억, 유만주의 집은 13억 수준이라고 한다. )

 

 

 

 

조선시대 1칸의 크기, 현재로 보면 약 1.8평

 

조선시대에서는 집의 크기를 칸으로 명시했다. 이는 초가집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1칸은 가로세로 2.4m로 현재로 치면 약 1.8평을 나타낸다. 당시 이은의 집이 380칸이라고 되어 있으니 1칸당 1.8평을 대입해보면 684평이 된다. 물론 이는 당시 조선 사회가 양반 중심의 사회였고 아무나 서울에서 집을 짓고 살 수 없었으니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대개 아무리 지체가 높은 양반이라고 해도 99칸을 넘길 수 없음을 볼 때 이은이라는 사람의 가문이 얼마나 위세가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주택을 철거할 때 드는 보상금은 기와집 1칸당 10냥, 초가집은 5냥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북촌한옥마을

 

 

 

 

|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싼 집값, 알뜰히 모으고 대출받아 사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당시 유만주라는 선비도 집값 2,000냥의 대부분은 사채를 빌려 충당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예나 지금이나 집을 살 때는 모은 돈에 대출을 보태 사는 것 같다.

나도 약 4년 전에 내 집 마련에 성공을 했는데 지인들에게 독하다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노력을 해서 겨우 산 집이다.

매월 300만원을 10년간 모았는데 단 한번도 건드리지 않고 모았다. 말은 쉬워보이겠지만 이렇게 모으려면 최소 8년은 단 한번도 직장을 잃어선 안되고 꾸준히 월급을 유지해야 하며 만약 월급이나 씀씀이의 변동이 생기면 알바를 뛰어서라도 충당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 내 집이 3억 정도였기에 대출없이 구입할 수 있었다.

당시 몇몇 지인들은 집에 놀러와 집값을 물어보곤 " 헐. 고작 그것밖에 안해? "라고 웃기에 " 너는 네 힘으로 1억이나 모아보고 그런 말을 해라. "라고 일침을 가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내 집이 낡고 허름한 아파트는 아니지만 나라고 왜 서울에 집을 안갖고 싶고 쟈O, 푸르지O같은 브랜드 아파트에 살고 싶지 않았겠나. 부모님이 능력이 돼서 집값 좀 보태줬으면 하는 마음이 왜 없었겠나.

나는 충분히 어른이고 내 인생을 설계할 책임이 있었다. 내 능력이 이 정도이고 이것 밖에 안되는데 형편에 맞춰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정말 부모님 세대처럼 덜 쓰고, 덜 놀고, 덜 먹으며 모았다. 돈도 별로 안 모아놓고 집은 서울의 요충지, 번화가, 역세권만 고집하고 있으니 집을 못사는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집값 비싸다는 말, 월급 모아 못 산다는 말을 하는 분들을 보면 " 모아보고나 말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놀 것 다 놀러가고 여행가고 사고 싶은 것 다 사면서 몇 년 모은 돈으로 집을 살 수 있다면 누가 돈 걱정을 하고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