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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어때?

강화 광성보 | 어재연 장군의 한이 서려있는 신미양요 격전지

신미양요 당시 승전한 미군이 노획한 어재연 수자기, 광성보 현장 모습 ( 1871년 6월 10일 ~ 12일 )

 

 

 

신미양요 1871년 6월 10일 ~ 12일간의 전투

 

오늘은 그 동안 꼭 가보고 싶었던 강화 광성보를 다녀왔다.

사실 김포 현준이네 밥집을 가려고 출발했는데 폐업했다는...결국 김포까지 온 김에 광성보로 달려가봤다.

조선 광성보는 사적 제 227호로 효종 9년 설치 된 진지이다. 이것을 숙종 때 보완하여 요새화 시키면서 지금의 광성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수도 서울 ( 조선시대에도 서울이라 불렀다고 한다. )로 진격하는 함정들은 모두 이 곳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강화도는 조선 수군은 물론 육군에게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강화도 광성보 정문인 안해루의 모습.

 

 

신미양요 당시 미군과 처음 붙은 조선군은 무기, 군사 수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여러 차례 내전으로 전투 경험이 오른 미군과 오랜 평화로 전투 경험이 없는 조선군의 전투는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3일간의 전투로 조선군은 크게 대패하였고 강화도의 대부분 진지들이 점령된다.

당시 미군은 물론 미국 내에서도 조선군의 용맹함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고 하는데 실제 전투에 참전했던 미군은 " 횐 옷을 입고 돌멩이, 흙을 손에 쥐고 달려드는 그들의 눈에는 죽음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 " 지금까지 만나본 적군 중 가장 용맹했다. "라고 말했으며 당시 미국 언론은 " 이겨도 이긴 전투가 아니였다. "라며 조선군의 용맹함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광성돈대 내부, 화포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포구가 있다.

 

 

평일임에도 주말을 앞둔 화창한 날씨여서 그런지, 관광을 온 분들이 꽤 많았다.

진지 내에 있는 화포들은 당시 사용하던 것들이라고 알고 있는데 당시 조선군의 화포는 폭발력이 있는 포탄이 아니였고 침몰을 시키는 용도의 포탄이어서 화력이 약했다고 한다. 사정거리도 700m 였지만 정확도도 낮았다고.

 

 

 

산책로로 잘 정비 된, 하지만 편의 시설은 매우 낡은.

 

광성보 내부는 꽤 넓직하다. 지금은 산책로지만 당시에는 진지였을 것.

 

 

광성보는 강화도에 있는 다른 진지에 비해 그 규모가 꽤 있는 편이다. 초지진이나 덕진진에 비해서.

실제 조선 시대에는 성벽이나 그 규모가 더 컸을지는 몰라도 현재 갖춰진 규모로는 광성보가 가장 넓다고 할 수 있다.

산책로로 잘 꾸며져있어 걸어서 산책을 하기에도 매우 좋다.

 

 

 

순돌목 돈대의 모습, 거센 물살이 잘 보인다.

 

 

어재연 장군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곳으로 알려진 순돌목 돈대.

광성보 내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과 아우 어재순 그리고 군관을 포함해 총 250명의 조선군이 전사하였다. 어재연 장군의 부대를 상징하는 수자기는 이 곳에서 미군에게 빼앗겼다.

빼앗긴 수자기는 미국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고 현재 국내로 반환됐지만 장기 임대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다만 조선 장수의 수자기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진품이기에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51명의 무명병사의 묘, 신미순의총

 

51명의 무명병사들의 묘 신미순의총 (辛未殉義塚)

 

 

순돌목 돈대를 내려와 용두돈대로 가는 길목에 작은 담장 너머로 7기의 봉분이 있다.

어재연 장군과 아우 어재순의 시신은 추후 수습해 충남으로 이장되었고 다른 병사들의 시신도 신원 확인을 거쳐 모두 가족들 품으로 보내졌다고 하는데 51명의 병사들은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이렇게 광성보 내에 묘를 마련해 넋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다음에 가게 되면 위대한 희생에 대한 묵념을 드려야겠다. 

소풍을 왔는지 초등학생들이 너무 많아 마음 속으로만 인사를 드렸다.

 

 

 

용두돈대로 가는 길, 어재연 장군은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해본다.

 

 

가장 낮은 곳, 그리고 바다에 인접한 용두돈대.

용두돈대로 걸어가는 길목에서 어재연 장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청나라를 섬기느라 엉망이 된 군대, 세도가들로 조정은 무능해졌고 임금은 힘을 잃은 그 상황에서 쳐들어오는 적함을 바라보며 어재연 장군은 어떤 마음으로 필사의 항전을 준비했을지.

 

 

 

광성포대의 모습, 2004년 유적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용두돈대에서 우측으로 바라보면 능선같은 곳이 있다.

이 곳이 바로 용두돈대로 진격하는 적함을 측면에서 포격할 수 있는 포대라고 한다.

앞 쪽에 4기가 있는데 이 곳은 줄로 막아놨지만 뒤쪽으로 있는 8기의 포대는 줄이 없어 실제로 들어가 볼 수도 있다.

과거에는 길이 열려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길이 없어 되돌아 나와야 한다.

원래는 이 포대가 있는지 몰랐으나 2004년 유적이 발굴되면서 조사를 해 복원해두었다고 한다.

 

 

 

광성포대 위에서 바라 본 모습, 적선을 화포로 공격하기 좋게 설계되어 있다.

 

 

광성보 여행은 짦지만 무언가 뭉클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신미양요의 최고 격전지가 광성보 전투라면 병인양요의 최고 격전지는 바로 문수산성이라고 하는데 다음에는 문수산성을 가보고 싶다. 찾아가고 싶었지만 길이 막힐 것 같아 서둘러 주차장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광성보 여행이었다.

 

 

 

| 한이 많은 조선 후기, 우리도 일본처럼 서양 문물을 빨리 받아들였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많은 분들이 조선이 망한 이유로 " 임금이 무능해서 "라고 말하지만 실제 역사학자들은 두 가지의 원인을 들고 있다.

하나는 세도정치로 인한 부정부패, 둘째는 쇄국정책 때문이라고 말이다.

물론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지금의 우리와는 다를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알고 바라보기 때문.

영화 < 광해 >에서 나온 것처럼 사대의 명분이 중요하고 청황제가 중요한 시대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군비를 늘리고 병력을 증강하는 일을 백성들이 동요한다고 막았던 조선 사회.

어쩌면 그때와 근래의 우리나라는 매우 흡사한지도 모르겠다. 국방력이 곧 나라의 힘임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쟁의 두려움에 떨면서 말로만 평화를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임진왜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일제 식민지 시대 모두 나라가 힘이 약하고 강대국에 빌붙어 의존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