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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정보

슬랩스틱 코미디의 대가 심형래, 14년 만에 개그콘서트에 출연하다.

대한민국 코미디의 대부 심형래 ㅣ1958 ~

 

 

 

1980년대 대한민국 코미디계를 이끌었던 주역들이 상당수 있다.

현재 코미디 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학래, 활발한 제 3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최양락, 코미디언에서 영화배우로 전직에 성공한 임하룡 등 다양한 코미디언들이 그들이다.

하지만 1980년대를 거의 독주하다시피한 코미디언이 있다. 영구, 우뢰매, 디워로 기억되는 심형래가 바로 그렇다.

당시 심형래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처럼 자유로운 시대도 아니였고 방송검열도 상당했으며 언론과 TV매체가 지금보다도 열악하던 시대였음에도 그는 전국민적 사랑을 독차지했다.

TV 코미디 프로그램은 물론 영화에도 출연, 전국 어린이들은 물론 2030세대들의 사랑을 받았다.

 

 

 

1980년대 연 120억을 벌던 전설적인 코미디언

 

심형래의 수입은 단연 당시 연예인들 중 독보적이었다고 한다. 광고 출연만으로도 7천만원을 받았고 출연료로 최고였던 배우 안성기가 당시 1500만원을 받았다고 알려졌는데 그 금액도 지금으로 환산하면 엄청났지만 심형래는 그 10배 이상을 받았다고 한다. 무려 2억원.

심형래는 슬랩스틱( slapstick ) 코미디를 주무기로 ' 영구 '라는 독보적인 바보 캐릭터를 활용했다. 1990년대가 복숭아학당의 오서방, 맹구의 전성시대였다면 영구는 1980년대 TV와 극장가를 휘어잡던 바보 캐릭터의 원조 격이었다.

 

 

1980대는 그야말로 심형래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영구의 인기에 힘입어 당시 < 영구와 땡칠이 >라는 영화가 시리즈로 개봉되기도 했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개 '땡칠이'도 큰 인기를 구가했고 SF공상영화 < 우뢰매 >도 심형래의 바보 연기와 진중한 에스퍼맨 등 1인 2역을 소화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는 코미디언들이 연예계를 주름잡던 시대로 각종 행사와 사인회 등이 많았는데 심형래의 몸값이 너무 비싼 탓에 어중간한 행사나 사인회에서는 심형래를 직접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심형래는 그러한 인기를 등에 업고 연 120억원의 고수익을 올렸던 유일한 연예인이었다.

1979년 완공된 강남의 은마 아파트가 당시 2천만원 ~ 5천만원의 가격대를 형성했던 것을 감안하면 심형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엄청난 도전, 비록 큰 실수를 했지만 그의 인생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되는 이유

 

지금에야 1000만 영화 운운하지만 불과 10년, 15년 전만해도 한국 영화는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지 못했었다.

1990년대 후반에 중국 시장에 진출하는 한류 스타들이 속속 등장했지만 영화계는 100만도 쉽게 넘보지 못할 정도로 외국 영화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졌었다.

그때 심형래는 TV 프로그램을 떠나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최초의 국산 CG기술을 적용한 영화 < 디워 >를 제작, 개봉하기에 이른다. 

당시 영화 촬영을 위해 미국 LA 도심에서 도로 통제와 군사장비 협조를 받아냈을 만큼 심형래는 진심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신지식인 1호 연예인에 등극하게 됐다. 

 

 

국내 CG기술로 만든 영화 < 디워 2007 >, < 라스트갓파더 2010 >

 

 

 

당시 심형래는 TV와의 인터뷰에서 " 우리가 못 만드는 게 아니다. 못해서 안하는 게 아니라 안해서 못하는 것일 뿐이다. "

라는 말을 해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국산 드라마, 가요, 영화 제작 등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고 열정도 풍부하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정해놓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부분을 꼬집은 것이다.

 

영화 <디워>는 국내에서 8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인기를 끌었는데 사실상 애국심 마케팅 효과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미국에서도 개봉됐지만 많은 평론가들이 혹평을 쏟아냈다. 다만 " CGI 부분은 확실히 볼만했다. "는 평가가 지배적이어서 제작비를 CG기술에 다 썼냐는 웃지못할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후속으로 제작 된 < 라스트 갓파더 >는 심형래는 물론 영구아트무비까지 몰락의 길을 걷게 한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 너무 영구 하나로 시대에 뒤떨어진 개그코드를 남발하는 것 아니냐. "는 비난까지 있었고 실제로 이 비난은 대중들도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영구아트는 임금체불, 불법 총기 개조, 심형래의 도박 파문 등 각종 사회 뉴스를 도배하다 파산과 함께 심형래 역시 179억원이라는 큰 채무를 남긴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심형래는 어떻게든 재도약을 꿈꿨지만 이미 대중들은 더 이상 그를 뛰어난 영웅, 개그맨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개그콘서트 14년만에 재출연, 심형래표 슬랩스틱은 이미 구시대적 개그코드

심형래의 빚은 179억원이었다고 하는데 결국 개인파산을 신청, 모든 돈을 잃었다.

 

 

 

1980년대에는 통했지만 1990년대 중반이후 슬랩스틱 개그는 더 이상 대중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종종 여러 개그맨들이 슬랩스틱을 활용한 콩트를 선보여 인기를 얻긴 했지만 확실히 슬랩스틱의 개그는 꾸준히 사랑받기 어려운 면이 있다. 사실 슬랩스틱은 무성영화(목소리가 담기지 않는 영화)가 나오던 시절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상황을 전달해야 하다보니 탄생 된 연기의 일종이었다.

 

그러다 보니 몸짓, 신체를 활용한 움직임이 많아야 했고 이것이 대중들의 배꼽을 이탈시키면서 하나의 개그 장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를 국내에서 가장 잘 활용한 코미디언이 바로 심형래였다.

하지만 심형래는 현재까지도 종종 TV에 출연, 과거 자신을 있게 한 슬랩스틱을 선보이고 있다. 물론 당시 TV를 보며 살아 온 1980년대생들에겐 그나마 추억이자 향수를 불러일으켤 수 있겠지만 더 이상 큰 웃음을 선사하진 못한다.

 

그런 심형래가 14년만에 다시 한번 개그콘서트에 출연한다고 한다.

이는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지만 아직도 자신이 활약했던 1980년대를 회상하며 방송에 나온다면 시청자들을 매우 불편해 할지도 모른다. 최양락이 지금 3의 전성기를 맞이한 이유는 특유의 깐죽개그와 지금도 통용되는 재치있는 입담 때문이다.

그의 개그를 듣는 옛 세대에겐 당시의 추억을, 현재 세대에겐 당시의 개그를 맛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심형래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