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굉장히 낯이 익은 이름의 감독이지만 그에 대해 대중들에게 알려진 바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영화가 성공하면 배우들에게 이목이 집중되지, 감독이나 영화를 제작하는데 일조를 한 스태프들에게는 관심이 덜하기 때문이다. 스타 감독들이 스태들 못지 않게 언론에 노출되는 외국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대중들에게 친근하고 많이 다가간 감독이 적은 이유이다.
2019년 5월 개봉작 <기생충>으로 국내에서 대박을 터뜨린 봉준호 감독은 기세를 몰아 해외에서 호평을 받으며 아카데미에 후보로 선정되는 영광도 안았다. 급기야 최우수작품상,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거머쥐는 최고의 영예도 안을 수 있었다.
| 봉감독의 무명생활 생활고, 아내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다
무명 생활은 배우나 가수 등 연예인만 하는 건 아니다. 일반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도 따지고 보면 무명생활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직장인들은 최소한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는 정도일 뿐.
공연, 예술,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는 무명 생활이 사실상 필수이다. 이름이 알려져야 투자나 후원, 지원 등을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 모든 걸 할 수 없기에 이를 도와 함께 할 스태프들도 있어야 하는 만큼 자금이 없으면 그들의 급여조차 줄 수 없으니 말이다.
봉준호 감독은 MBC스페셜에서 과거 무명 생활 당시를 회상했다. 대학은 연세대 사회학과를 나왔지만 영화를 만들고 싶어 감독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외조부님부터 아버지, 형, 누나가 모두 예술 계통에서 종사한 따지고 보면 예술계 집안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다.
1997년 <모텔선인장>은 봉준호 감독이 조감독 겸 시나리오에 참여한 작품이다. 이미연 / 박신양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했던 영화. 당시 1년 10개월 정도 참여했는데 받은 급여는 450만원이었다고.
95년 시나리오 작가였던 아내와 결혼했던 봉주누호 감독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2년에 걸쳐 번 돈이 500만원도 안되었기 때문이다. ( 또한 당시는 IMF가 막 터지기 일보 직전이던 시기 )
봉준호 감독은 당시 영화를 그만둘 생각도 할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였고 아내에게 "딱 1년만 더 해보겠다."라고 양해를 구했고 아내는 "좋다. 못 먹어도 고! "라고 동의해 주었다고. 물론 아내 외에도 그의 어려움에 대학동기가 쌀을 가져다 주는 등 지인들의 도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 세계적인 감독 대열에 올라선 봉준호 감독, 뒤엔 믿어주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
뒤늦게 재능을 인정받은 분들의 뒤엔 대부분 남편의 재능을 알아보고 함께 힘든 생활고를 견뎌내 준 아내가 있었다. 배우 진선규 역시 오랜 무명 생활 동안 아내가 묵묵히 그의 연기력을 알아보고 내조를 한 덕분이라고 하던데, 봉준호 감독 역시 그런 케이스이다.
이래서 다들 결혼을 하나보다. 정말 힘들고 일도 안 풀려 포기하고 싶을 때 말없이 뒤에서 응원해주는 아내를 보며 다시 한번 힘을 내는 원동력을 얻기 때문에.
앞으로 더 좋은 영화, 그리고 어려운 영화 관계자들에게 조언과 많은 힘이 되어주는 감독이 되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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