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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슈

한국전쟁 70주년, 말로만 기억하지 말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

2020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04시경. 북한군이 포격을 쏟아부으며 38도선을 넘기 시작한 것이 6.25 전쟁, 한국전쟁이다.

물론 당시 한국에도 군대라는 것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제대로 된 탱크나 무기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또한 어찌된 일인지 당시 북한의 남침설이 제보되기도 했지만 정부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확실히 대책없는 건 이 나라의 전통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초대 대통령이 기회주의자인 리승만이었으니 말 다했으리라.

 

나라 빼앗기고 독립을 맞이한 지, 얼마나 됐다고 우리나라는 또 한번 총성으로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나마 독립한지 얼마 안돼서일까. 조국에 대한 의지와 충성심은 하늘을 찔렀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발발 3일만에 서울까지 함락되고 정부는 국민들에게 안심하라고 녹음 방송을 틀어놓고 피란가버리고 한강철교마저 폭파해버렸다. 한심과 무능의 기준같았던 한국은 솔직히 UN과 미국이 아니였다면 아마 공산화가 됐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미국에게 고마워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고 지금 미국과의 관계는 지금의 관계인 것이니까. 민주주의 국가인데도 이렇게 거지같은데 공산주의 국가였으면...생각을 하지 말자.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간의 전쟁이었다.

 

 

| 3년 1개월간의 전쟁. 군인 13만명 전사, 민간인 피해 25만 이상 -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도 과거와는 달리 많이 변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각 학교에서는 반공 포스터, 글짓기 등은 물론 북한과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지금도 딱히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과거에 비해 그나마 교류나 대화의 시간이 많아진 건 맞다.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계획하고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 모택동이 수락해 벌어진 참극이다. 물론 소련이 처음부터 한국전쟁을 수락했던 건 아니다. 당시 소련은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 했기 때문에 사실 전쟁 계획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워낙 꼭두각시로 충성을 다하는 김일성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뭣했기 때문에 "중국이 참전 동의를 하면 수락하겠다."라는 조건부 수락을 한 것이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참전하지 않았지만 전쟁 물자와 일부 병력을 위장해 참전시키기도 했다.

 

사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재빠른 공격 계획만 제대로 이행했다면 한반도는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서울 점령까진 빨랐지만 그 뒤로는 북한의 공습이 더뎌지는 등의 판단 부족이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개입과 전쟁 양상을 뒤엎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꿈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학도병으로 지원한 어린 학생들, 형제가 모두 참전해 전사한 가정 등도 많았다고 한다. 그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임은 틀림없다.

 

 

동방의 작은 나라의 평화를 위해 참전해 준 고마운 국가들도 있었다.

 

 

또한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위해 선뜻 참전을 결정해 준 고마운 국가들이 있었다. 참전한 국가와 물자 등을 지원한 국가들이 많았는데 그 국가들 역시 무언가를 바라고 자국의 병력을 참전시킨 건 아니였다.

오로지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먼 타국까지 병력을 투입해 평화를 위해 싸운 것이다.

역시 이 분들에게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당시 소련의 남침작전 계획서

 

 

이제 이 지구상에서 공산주의 국가를 표명하고 있는 국가는 북한이 유일하다고 한다. 소련은 이미 붕괴돼 러시아로 변경됐고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민주주의식 사회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100% 순수한 공산국가라 볼 수 없다.

공산당이 집권하고 1인 독재 체계의 공산주의는 북한 뿐이다. 물론 이같은 북한의 체제 구도를 바꾸고자 했던 인물도 있기는 했었다.

 

2017년 말레이시아에서 암살 된 김일성 - 김정일의 적통장자인 김정남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김정남은 김정일의 장남으로 김일성이 매우 아끼는 손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찍이 후계자로 내정되었고 김정남은 중국을 보며 북한도 중국처럼 바뀌어야 경제 개발에 성공하고 인민들이 어느 정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같은 발상은 당시 북한 체제에서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고 아무리 적통장자라고 해도 아버지에 대한 도전이며 집안이 일군 체제에 대한 위협이었다고 생각했는 듯 하다. 1996년부터 김정남은 후계 구도에서 제외되기 시작한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집안 문제로 인해 김정일이 김정남을 후계자에서 제외했다고 보고 있지만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아무래도 체제의 불안 요소라고 판단한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6.25와 관련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할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몇 가지만 간략하게 명시해볼까 한다. ( 잘못 된 정보가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본 내용은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 된 것임을 알립니다. )

 

 

1. 육탄10용사의 진실

 

매년 5월 4일 육탄10용사에 대한 추도식이 거행되고 있다고 한다.

 

먼저 육탄10용사는 한국전쟁과는 관계가 없는 분들이고 일화이지만 한국전쟁을 거론할 때마다 언급되는 분들이기에 적어볼까 한다. 한국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4월 당시 북한 인민군 1사단 3연대 병력이 개성 송악산 인근으로 집결, 5월 3일 남방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이에 국군 제1사단 11연대 병력이 즉각 방어에 나섰지만 역부족으로 후퇴하고 마는데, 다음 날부터 송악산 고지를 재탈환하기 위해 몇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북한군의 토치카 앞에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이에 육탄공격만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 여긴 국군은 지원자를 모집하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적진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살될 것이 뻔한 작전이었기에 사실 무의미한 작전이라 판단된 것이다.

하지만 서부덕 이등상사, 박창근 하사 외 8명의 지원자가 조국 수호를 위해 자원을 했고 이들은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장착해 만든 폭탄을 들고 적진을 향해 돌격을 감행한다. 

 

1949년 5월 4일 정오 12시경. 박창근 하사가 먼저 돌격하지만 북한군의 집중 사격에 전사하고 이를 본 나머지 대원들이 필사적으로 돌격, 끝내 고지 탈환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는 일화이다.

추후 우리 군은 이 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육탄10용사"라 명명하고 추모했는데, 일각에서는 날조 된 기록이라는 설이 제기 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적진으로 돌진한 박창근 하사의 시신은 찾았지만 나머지 대원들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일부에서는 이들이 북한군에게 발견, 항복하면서 북으로 귀순해 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실제 당시 평양 방송을 통해 이같은 일이 소개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사단장은 사살 명령을 내리지만 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은 "모두 자폭했다."고 정정해 보고, 일단락 되었다고 한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통일이 되어서나 훗날 밝혀지겠지만 당시 국방부도 확인했다는 말까지 있는 이상 무조건 믿기에는 조금 찜찜한 일화이기도 한 게 사실이다. 

 

 

 

2. 서울 수복 후 중앙청 태극기 게양 사진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국군의 모습"으로 잘 알려진 사진

 

 

교과서나 각종 한국전쟁 자료에서 위의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수복한 국군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촬영한 사진으로 잘 알려진 사진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위의 사진은 1954년 한국 전쟁이 끝나고 서울 수복 기념식에서 당시를 재연한 장면을 촬영한 것이라 한다.

 

서울 수복 당시 서울 시청은 국군의 관할 구역이었지만 중앙청은 미군의 전쟁 수행지역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군이 중앙청 탈환에 실패하면서 일이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 군은 시청 탈환 후 동대문 운동장 방면으로 진격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당시 박정모 소위의 생각은 달랐던 것.

 

그는 "외국군이 국기를 게양하는 건 우리의 수치"라고 판단, 이를 상부에 보고하고 결국 대대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 1차 공격을 감행했지만 북한군의 격렬한 저항에 실패하고 50년 9월 27일 새벽 2차 탈환전을 감행, 결국 중앙청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당시 퇴각하던 북한군이 방화를 하고 모든 시설을 파괴해 박 소위는 옥상쪽으로 올라가 국기를 게양했고 9월 28일 국군과 미군이 진격해 오면서 완전한 탈환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작전지역 이탈로 군법에 회부돼 중징계를 받을 수 있었던 사안이기도 하지만 당시 미군은 국군의 열정에 감동, 특별히 문제화하지 않았고 미국 트루먼 대통령 역시 이 분들의 공을 치하하며 표창해 줄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위의 사진은 한국 전쟁 때는 촬영하지 못했고 1954년 수복 기념식에서 재연 된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라고 한다.

사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의미는 그대로인 사진이기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3. 한국전쟁일(6월 25일)은 국기 게양을 한다? 안한다? / 정답은 "하지 않는다."

 

국기를 게양하는 국경일

 

예전에는 한국전쟁일 역시 국가가 지정한 공휴일에 포함되었지만 제외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6월 6일 현충일에만 국기 게양 (조기로 게양)을 하고 6월 25일에는 하지 않는다. 어차피 요즘은 많은 분들이 귀찮다는 이유로 국기 게양을 하지 않아 별 의미는 없지만 혹시 "게양을 해야 하는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명시해본다.

그래도 "진짜 안해도 되는 날인가?"하고 의심이 되는 분이라면 밖에 나가 도로가를 살펴 보시길 바란다.

 

국기를 게양해야 하는 날이라면 각 지자체에서 이미 1~2일 전에 도로가에 국기를 게양하지만, 없는 것으로 보아 하지 않는 날이 맞다는 걸 알 수 있다. 국기는 게양하지 않지만 마음으로나마 호국영령 분들의 넋을 기려야 할 것이다.

 

 

 

4. 북한의 원래 국기도 태극기였다? 

 

현재 북한의 공식 국기는 인공기이다.

 

 

북한의 공식 국가명칭은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다. 또한 국기는 흔히 '인공기'라고 부르지만 홍람오각별기라고도 한다. 이처럼 북한의 국기 역시 이제는 특별할 것이 없지만 북한이 원래 우리와 한 민족이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

태극기는 잘 알려진대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일본 수신사 일행이 직접 제작, 사용하면서 국제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조선의 공식 국기가 있기는 했지만 이미 그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터였다.

 

따라서 임시정부 때부터 태극기가 공식 국기처럼 사용되어 왔고 1948년 정부 수립에 맞춰  태극 문양과 사괘에 대한 규정과 규격이 통일, 제정돼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북한에서도 한국전쟁 전까지는 태극기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물론 북한도 예외는 아니였다. 북한에서도 각종 전당 대회나 연설 등지에서 태극기가 게양돼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1948년 7월 8일 북한은 북조선인민 제5차 회의에서 애국가와 태극기의 사용을 폐지하기로 결의하고 당시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게양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1946년 노동당 창립대회나 선거회장, 유세장에서도 태극기는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각종 기록사진으로도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호국 영령 분들의 희생에 감사를 드린다.

 

 

바쁘다는 이유로, 이제는 오래 된 역사라서 그 의미가 점점 희석되고 있는 한국전쟁.

물론 민족의 비극이고 좋은 역사는 아니지만 한국전쟁 역시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겪은 실제 역사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필 한국전쟁 발발일에 맞춰 북한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어 더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북한이 또 의미 되새기겠다고 6월 25일 새벽에 기습 도발을 하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우리는 그 동안 참전 용사 분들의 인터뷰나 회고 내용을 볼 때마다 말로만 "잊지 않겠다.", "감사하다."라고 한다.

그 분들이 본인의 청춘을 바쳐 나라를 지켜냈다면 이제 우리는 그 분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

말로만 추억과 위로가 아닌 진심을 담아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