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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강화 광성보 | 어재연 장군의 한이 서려있는 신미양요 격전지 신미양요 1871년 6월 10일 ~ 12일간의 전투 오늘은 그 동안 꼭 가보고 싶었던 강화 광성보를 다녀왔다. 사실 김포 현준이네 밥집을 가려고 출발했는데 폐업했다는...결국 김포까지 온 김에 광성보로 달려가봤다. 조선 광성보는 사적 제 227호로 효종 9년 설치 된 진지이다. 이것을 숙종 때 보완하여 요새화 시키면서 지금의 광성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수도 서울 ( 조선시대에도 서울이라 불렀다고 한다. )로 진격하는 함정들은 모두 이 곳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강화도는 조선 수군은 물론 육군에게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과 처음 붙은 조선군은 무기, 군사 수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여러 차례 내전으로 전투 경험이 오른 미군과 오랜 평화로 전투 경험이 없는 조선군의 전투는 처음부.. 더보기
어재연 장군 수자기, 힘없는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훈 조선의 역사도 바로 현재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많은 문화재와 찬란한 유산들이 있는 조선이지만 그와 반대로 침략과 약탈, 강제점령의 수모를 겪은 비운의 역사를 간직하기도 했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 한국사를 정말 잘했다. 일찍이 부모님이 만화책으로 된 역사 서적을 사주었고 그 책은 정확히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고조선 시기부터 대한제국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의 역사를 만화로 정리한 책이었다. 정말 그 어떤 책보다 많이 읽었고 보고 또 보고를 반복했더니 딱히 수업을 듣지 않고 시험을 봐도 늘 1등을 할 정도로 한국사를 잘했었다. 많은 분들이 조선 말기의 일제 강점기를 두고 "왕실의 무능, 임금의 무능"으로 치부를 하지만 나는 그 생각에 반대한다. 그리고 그런 발상이야 말로 자국의 역사도 모르는 채.. 더보기
1871년 조선 최초 사진, 조선 후반기를 보면 대한민국의 특성이 보인다. 안타까운 조선의 후반기 1870년대 당시 미국은 지금과는 달리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였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조선이 봉건주의였기 때문에 굉장히 미개하고 국제 정세에 아둔했다고 생각하기 쉽상이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국가가 전통적인 봉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1900년대 후반 조선의 힘이 약한 것은 물론 세계 정세를 읽지 못한 부분도 책임이 있다. 청을 최고로 여기고 일제를 무시했으며 무사태평안일주의를 유지한 것도 분명 문제지만 가장 큰 것은 바로 세도정치가 문제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 아무리 권력을 가진 국왕이라 할지라도 일개 사람에 불과했으며 국가의 주요 보직을 섭렵한 여러 대신들이 단합해 왕을 핍박한다면 임금이라 해도 어쩔 수 없던 것이 바로 봉건제의 문제점이다. 1871년 신미양요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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