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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은 이야기

1871년 조선 최초 사진, 조선 후반기를 보면 대한민국의 특성이 보인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 종군기자가 촬영한 최초의 조선인 사진 /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안타까운 조선의 후반기

 

1870년대 당시 미국은 지금과는 달리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였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조선이 봉건주의였기 때문에 굉장히 미개하고 국제 정세에 아둔했다고 생각하기 쉽상이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국가가 전통적인 봉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1900년대 후반 조선의 힘이 약한 것은 물론 세계 정세를 읽지 못한 부분도 책임이 있다.

 

청을 최고로 여기고 일제를 무시했으며 무사태평안일주의를 유지한 것도 분명 문제지만 가장 큰 것은 바로 세도정치가 문제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 아무리 권력을 가진 국왕이라 할지라도 일개 사람에 불과했으며 국가의 주요 보직을 섭렵한 여러 대신들이 단합해 왕을 핍박한다면 임금이라 해도 어쩔 수 없던 것이 바로 봉건제의 문제점이다.

 

1871년 신미양요가 발발한다. 미국이 5년 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로 침공을 한 것이다.

이미 미국은 1775년~83년까지 영국을 상대로 독립 전쟁을 치뤄 승리했으며 그로부터 100년 뒤인 1860년~61년에는 남과 북이 나뉘어 내전을 치루기도 했다.

대포와 소총을 무기로 해 이미 여러 차례 전쟁 경험이 풍부한 미군에 비해 임진왜란 이후 이렇다 할 전쟁 경험이 없고 재래식 무기인 창칼과 화살로 무장한 조선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물론 강화도에도 화포가 있었지만 이는 적선을 침몰시키기 위한 화력용이라기 보다는 접근을 차단하는 방어용에 가까웠고 그나마도 사거리, 명중률이 낮은 화포에 불과했기에 강화도는 당시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 맥없이 함락됐다.

 

당시 미군함대에 승선했던 종군 기자 펠리체 베아토가 촬영한 이 사진은 1871년 5월 30일에 촬영됐으며 맥주병을 들고 있는 조선인은 당시 인천부 소속의 하급관리인 아전으로 있던 김진성이라는 사람이라고 한다.사진을 공개한 사진이카이브연구소 대표는 "당시 서양인들의 시각에 맞게 의도 된 사진"이라 설명했다. 대표는 "아무리 하급관원이라 해도 의복을 갖추고 승선했을텐데 갓을 벗고 찍었다는 것은 당시 동양의 3대 비위생 코드를 찍기 위함이었을 것"이라 부연했다.

 

동양의 3대 비위생 코드는 중국의 변발, 일본의 존마게(일본식 상투), 조선의 상투 문화를 말한다. 대표는 더불어 "미군이 버린 빈 맥주병과 영문 신문을 주워들고 좋아하는 모습은 서양이 동양보다 우위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묘사한 행위"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 종군기자가 촬영한 최초의 조선인 사진 / 사진아카이브연구소

 

 

불우한 역사도 우리의 역사, 다만 무사안일주의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는 깨달아야

 

과거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사안일주의가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오는지 충분히 지켜봤다. 스위스가 대표적인 중립국으로 현재는 이름을 드높였지만 과거에는 "말로만 외친 중립"으로 참담한 침략의 역사를 겪기도 했다.

멀리서 볼 것도 없다. 임진왜란도 그렇고 정묘호란도 그렇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 일제강점기만 해도 그러하다.

 

우리의 시각에선 침략한 외적들이 나쁜 것이지만 그들의 시각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조선이 당한 이유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태했고 안일했으며 청이 우릴 지켜줄 것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청도 서양 강대국들에게 꼼짝도 못한다는 걸 조선은 몰랐을 것이다.

 

조선 후반기의 모습은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본다.

물론 지금은 국제 정세가 "무의미한 전쟁, 침략 전쟁은 불법행위"로 보고 세계 각 국이 견제하기 때문에 과거만큼 전쟁이나 침공을 당할 일이 없겠지만 말로만 안보, 평화를 외치며 무사태평안일주의로 살아가는 건 여지없이 같다고 본다.

 

원래 역사는 살아남은 자, 힘있는 자들의 입장에서 씌여진다.

지금은 이렇지만 만약 몇몇 강대국들이 다시금 전쟁을 벌이고 침략 전쟁을 시작한다면 대한민국은 또 같은 수모를 당할 수 밖에는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