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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X파일

복서 김득구, 그는 비운의 복서가 아니다.

1982년 11월1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펠리스 호텔 특설 링에서 故김득구 선수와 세계챔피언 맨시니가 경기를 가졌다.

 

 

1960 ~ 80년대는 복싱이 국내 스포츠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가 아닐까 한다.

다같이 어렵고 힘든 시절, 복싱은 그나마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는 몇 안되는 길 중 하나였다고 한다.

복싱 자체가 외국에서 만들어진 스포츠이다 보니 자연 국내에서는 외국에서 이름을 날릴 정도로 복싱을 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몇몇 분의 세계 챔피언을 배출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오늘은 그 동안 비운의 복서라고 알려진 故김득구 선수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먼저 김득구 선수에 대해 조금 이야기 한다면 그는 1956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의 본명은 이득구였지만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김득구로 이름이 개명 된 이력이 있으며 이복형제들과도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이 싫었던 김득구는 어떻게서든 학업과 성공을 위해 노력했고 우연히 복싱 포스터를 보면서 복싱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줄 유일한 출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2002년 곽경택 감독 영화 <챔피언>, 김득구의 일대기를 그려 많은 감동을 선사했다.

 

 

국내에서는 적수가 딱히 없었던 김득구, 세계를 바라보다

 

서울로 올라 온 그가 바로 복싱을 시작한 건 아니다. 한동안은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생활을 했고 곧 동아체육관에 입문, 복싱 선수로 전환한다. 저돌적인 스타일을 구사하는 김득구에게 아마추어들은 상대가 될 수 없었고 이윽고 프로 데뷔를 한다. 하지만 번번히 패배를 하며 프로 세계의 벽을 실감하고 잠시 방황하던 그는 곧 마음을 다잡고 재기에 나선다.

그리고 국내 챔피언 획득, 동양 태평양 챔피언을 획득한다.

 

2002년 개봉 된 영화 <챔피언>에서도 나오지만 당시 복싱은 유명했지만 복서의 삶이 그리 여유로웠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특히 아내 이영미 ( 어디서는 이경미라고도 하고 실제로는 이영숙이라고도 한다. )씨와 연애는 했지만 처갓집의 반대가 심해 이별을 하기도 했고 동양 챔피언이 되면서 결혼 승낙을 받았다고 한다.

 

번듯한 가정을 꿈꾸던 김득구에게 동양 챔피언은 그저 과정에 하나일 뿐이었다. 김득구는 이내 세계 타이틀 매치에 도전을 하게 되고 그 상대가 바로 라이트급 세계챔피언인 레이 맨시니였다. 맨시니는 당시 미국에서 핫한 복서로 2대에 걸친 복서 집안이었다. 좌우 훅이 강렬한 타입으로 별명은 '붐붐'이었다고.

 

 

김득구 선수와 약혼녀 이영미씨, 레이 맨시니와 경기 중 14R에서 다운당한 김득구 선수의 모습

 

 

이때 아내는 임신 7개월차였고 김득구는 "반드시 챔피언이 되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미국으로 향한다. 

미국에서 김득구는 자신의 숙소에 '사느냐, 죽느냐.'라고 적어놓았는데 그만큼 모든 것을 건 경기였다고 한다. 이때 이 글귀를 미국 기자가 "죽느냐, 죽이느냐"로 잘못 이해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데 이는 레이 맨시니도 훗날 인터뷰에서 "그가 그렇게 무서운 생각을 했는지는 몰랐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아무리 미국이 한국전쟁 때 도움을 주었다고는 하나 당시 미국 사회는 한국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또한 백인 챔피언에게 동양의 황인이 도전한다는 자체가 이미 미국으로는 가소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경기 시작 전임에도 경기 결과는 맨시니 측이 우세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일 정도였다.

그렇게 김득구는 오롯이 혼자, 두 주먹을 가지고 링에 올랐던 것이다.

 

 

김득구 선수의 비보에 직접 미국으로 가서 유해를 가지고 돌아 온 유가족들

 

 

14R에서 경기 종료, 끝내 닿지 못한 챔피언 벨트...

 

예상과는 달리 동양에서 날아 온 도전자의 주먹을 매서웠다. 맨시니는 2차 방어전임에도 경기를 리드하지 못했다.

9R까지 결과는 김득구에게 살짝 더 유리했던 상황, 이때 김득구가 맨시니의 뒷통수를 가격하는 실수가 나왔고 이로 인해 심판에게 경고를 받았다. 적지인데다 무리한 감량, 그리고 세계 챔피언과의 일전까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김득구에게는 불리한 시합이었다. 장기전으로 갈 경우 불리함을 느꼈던 김득구는 초반부터 맹공을 펼친 탓에 10R부터 체력이 고갈됐다. 김득구는 밀리기 시작했고 사실상 12 ~ 13R는 일방적으로 맞는 경기였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였다고 한다.

 

그리고 14R에서 김득구는 다운이 됐고 그대로 경기는 종료됐다.

김득구는 들것에 실려 바로 병원으로 이송됐고 수술 끝에 호전 됐다는 기사가 나왔지만 사실 점점 상태가 악화,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어머니 양씨는 미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경비가 없었고 복싱협회의 도움으로 겨우 미국으로 건너가 아들의 상태를 확인한다.

 

그리고 여러 말들이 많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장기를 기증한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발표를 하고 아들의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다. 4개월 후 아들을 먼저 보낸 죄인이라는 말을 자주 했던 어머니는 끝내 아들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당시 경기의 심판을 봤던 리처드 그린 역시 비극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우울증을 앓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딸은 추후 맨시니에게 " 꼭 그 경기 때문은 아니였다. 여러 가지 일이 복합적으로 작용됐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경기 후 복싱 룰이 변경됐다. 일단 15R였던 규칙이 12R로 축소됐고 라운드당 휴식 시간이 30초 더 늘어났으며 스탠딩 다운제도가 도입돼 선수 보호 측면이 강화됐고 무엇보다 의사의 재량에 따라 경기를 결정하는 닥터 스톱제가 도입 된 계기가 되었다. 

 

맨시니 역시 화려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는 김득구의 사망 소식 이후 죄책감에 시달렸고 경기 스타일까지 바꿨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기존의 그의 경기 스타일과는 확연히 달랐고 경기력 또한 안 좋아질 수 밖에 없었다고. 결국 그는 은퇴를 한다.

 

 

 

2011년 레이 맨시니는 김득수 선수의 아내와 아들을 미국으로 초대, 직접 만나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 2011년 레이 맨시니, 김득구의 가족을 초대하다

 

맨시니는 오래도록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아버지에 뒤를 이어 복서가 됐고 챔피언까지 할 만큼 복싱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을 그가 은퇴를 하고 직업을 복싱이 아닌 다른 계통으로 선택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맨시니는 2011년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으로 성장한 김득구의 아들 지환씨와 아내 영미씨를 미국으로 초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김득구의 아내와 아들은 "이제 그만 괴로워 하셨으면 좋겠다."라며 위로했다고 한다. 아무리 경기 중에 일어난 사고라고 하지만 아버지를 잃게 만든 장본인에게 위로를 한다는 게 사실 말처럼 쉬운 건 아니였을텐데 말이다.

 

영화 <챔피언>이 제작 될 당시 김득구희 이복형은 "조금이라도 동생의 일이 거짓으로 비춰지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전에 제작 된 영화에서 왜곡 된 내용이 있었기에 영화 제작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이에 곽경택 감독은 "고인의 일대기를 다루는 것이라 픽션이 안 들어갈 수는 없지만 고인에게 욕 먹을 짓은 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영화를 제작했다고 고백했다.

 

김득구.

그는 비록 세계 챔피언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한국 챔피언과 동양 챔피언을 이룬 프로 복서였다.

그리고 세계 복싱 역사에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복서이기도 하다. 세계 챔피언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리고 경기로 인해 사망했다고 해서 그가 비운의 복서로 불리는 것에는 반대적인 입장이다.

 

그는 자신의 두 주먹으로 복서의 삶을 당당히 살았고 최선을 다해 챔피언과 맞서 싸운 도전자였다.

그는 비운의 복서가 아닌 최고의 도전자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