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범죄 X파일

국군포로 장무환 할아버지 귀환 사건, 그리고 공분의 대사관녀

1998년 10월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국 제작진이 그 어떤 정부 기관보다 나았던 사건이다.

 

 

북한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딱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 거의 인생의 절반을 탄광에서 감시와 차별 속에 지내야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지도 모른다. 나라를 위해 싸워달라는 말에 가족을 뒤로 하고 전쟁에 참전했던 청년은 포로가 되었고 이후 국가의 방치와 무관심 속에 고향으로 돌아간 날만을 그리며 평생을 견뎌냈다.어느 노병의 실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1998년 전사자 신분에서 살아 귀환, 상병으로 면역식을 치른 참전용사 국군포로 故장무환 할아버지의 실화이다. 당시 귀환에 적극적으로 함께 한 것은 정부 기관이 아닌 SBS방송국 <그알>의 제작진이었다.

 

 

군대만 3번을 다녀 온 국군포로 장무환 할아버지, 그는 한국전쟁으로 포로가 되어 탄광에서 평생을 다 보냈다.

 

 

군대만 3번 다녀 온? 국군으로 참전했다 포로가 된 20대 청년

 

장무환 할아버지는 처음 정규 군대가 창설되기 전에 이미 군 조직에 몸담았었다. 당시 군인이 되면 굶을 일은 없었기 때문.

그리고 본격적으로 군대와 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 전쟁 발발 후였다. 인민군에 징집되었던 할아버지는 감시가 소흘한 틈을 타 탈영에 성공, 무작정 산길을 따라 걷고 걸어 남한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결혼 후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아들이 4개월쯤 되던 어느 날 국군이 되었다. 얼마 안 있다 휴전이 되었고 그렇게 할아버지는 포로 신분으로 북한으로 이송됐다.

 

곧 포로 교환으로 집에 갈 수 있다는 희망도 잠시, 포로 교환은 속전속결로 끝이 났다.

물론 할아버지는 집에 가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국군은 북한에 있어 굉장히 불순한 세력이며 반동분자였다.

총살 아니면 평생 탄광에서 일해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기약없이 시작 된 북한에서의 삶.

 

하지만 할아버지는 죽어도 고향 땅을 밟고 죽고 싶다는 일념으로 버텼고 결국 이제는 약해진 몸을 이끌고 탈북을 시도했다.

당장은 조선족의 집에서 은둔했지만 언제 적발돼 끌려갈지 모르는 나날이 계속됐다.

( 당시 조선족은 이런 약점을 잡고 1만 달러를 요구, 제작진이 돈을 마련해 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탈북자를 돕거나 숨겨주면 같이 곤란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

 

 

포로가 된 후 장무환 할아버지의 탄광 생활, 그의 나이 20대 초반의 어린 청춘이었다.

 

 

분노의 대사관녀, 8년 후 어설픈 사과로 인해 더 큰 비난을 받은 외교부

 

대한민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여권도, 돈도 없는 상황.

무엇보다 언제 공안이 닥칠지 모르는 환경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없었다. 장무환 할아버지는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건다.

"국군포로인데 좀 도와주시오."라고 하면 엄청난 환영을 받을 줄 알았던 기대도 잠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직원의 말투는 충격 그 자체였다.

 

국군포로라는 말에도 별 다른 감정없이 응대는 기본, 도와달라는 말에 없다라며 뚝 끊어버린 것.

국군포로이든 탈북자이든 전화를 건다는 자체가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일반 기업도 아닌 대사관이 그랬다는 건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긴 원래 한국 대사관들은 일 못하기로 유명하고 "차라리 없는 게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

 

8년이 지나 2006년 외교부는 이같은 일에 대해 사과했다.

X같은 대사관녀는 정규직이 아닌 임시 파견직원으로 퇴사했고 당시 국군포로가 화두가 아니다 보니 대응에 부적절했다는 것이 당시 외교부의 사과 내용이었다. 이에 네티즌들은 "관심 밖 사안이면 그래도 된다는 뜻이냐"라며 외교부 사과를 지적했고 더 큰 비난을 받았다.

 

 

공분의 대사관녀, 외교부는 이 일을 두고 "포로에 대한 이슈가 없던 때라 대응이 부족했다."라고 사과했다가 더 큰 비난을 받았다.

 

 

방송국의 도움으로 귀국에 성공, 외교 문제만 걱정하는 대한민국 정부

 

이미 중국에서 연락을 받았던 아들과 아내가 중국으로 건너와 상봉에 성공한 할아버지.

더 이상 지체했다가 공안에게 적발되면 안되겠다고 판단한 제작진은 서둘로 귀국을 추진했지만 또 하나의 난관에 부딪혔다. 북한에서는 모르겠지만 장무환 할아버지는 대한민국에서는 사망 처리 된 전사자 신분이었던 것.

여권을 발급받을 수 없었다.

 

신원미상의 브로커를 통해 위조 여권을 만드는데 성공, 무사히 출국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출국장 직원이 가로막았다. 도장이 찍혀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실랑이가 이어졌고 제작진과 할아버지 가족들은 필사적으로 항의했다.

 

"당신들이 실수로 안 찍어줘놓고 왜 이러느냐?", "누가 도장이 찍혔나 일일히 확인하나."라며 따졌고 대기줄이 길어지며 출국자들이 항의를 하자 결국 직원도 도장을 찍어주며 가라고 했다.

출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런 문제들은 모두 안일한 대한민국 정부의 탓이기도 했다.

 

수차례 정부 차원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장씨가 지금은 어쨋든 북한 주민이라 자칫 외교 문제로 와전될 수 있다."는 것이 정부 기관의 변명이었다. 즉 국민의 안전보다는 외교 문제가 더 걱정된다는 것.

 

 

대한민국으로 입국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장무환 할아버지는 가족에게나 국가에게나 죄인이었다.

 

 

| 나라의 부름에 응했지만 결국 나라로부터 버림 받았던 지난 삶

 

72세의 노년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 온 노병은 그야말로 가족이나 나라에 죄인이었다. 할아버지의 아내 분은 처음 남편을 본 자리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40분을 서 계셨다고 한다.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45년만에 나타났으니 그 야속함이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는 "북에 두고 온 가족이 없느냐."는 할머니의 첫 물음에 "결혼은 했지만 자식은 없다."라고 했다가 추후에 아들에게 다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할아버지의 잘못일까.

젊은 아내를 홀로 둔 남편으로의 죄, 아들에게 따뜻한 품 한번 내주지 못한 아버지로의 죄, 포로로 붙잡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나타나 나라를 곤란하게 만든 죄. 이게 할아버지가 당시 느꼈을 부끄러움이 아니였을까 싶다.

 

 

장무환 할아버지는 이후 아내 분과 잘 사시다가 2015년 9월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평생 그리던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가족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사셨다고 한다.

그리고 2012년 평생 남편을 그리며 살아오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고 3년 후인 2015년 할아버지도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평소 "그토록 그리던 이 곳에 왔는데 오고 나니 또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이 눈에 밟힌다."며 종종 북녘 하늘을 바라보셨다고 한다. 가족이 만나니 또 다른 가족이 이별하게 된 안타까운 일이다.

 

벌써 7년이 지났지만 故장무환 할아버지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할아버지의 참전이 지금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남게 된 원동력이 됐으며 그 분들의 희생과 노력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비록 정당 싸움과 선동, 분열이 판을 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