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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X파일

서울 노량진 보복 살인 사건, 1990년

1990년 서울 노량진 보복 살인 사건 보도 장면, 범인 박형택의 모습 / 인터넷

 

 

원래는 더 오래 전 사건을 작성 할 예정이었는데 너무 오래 된 사건이라 그런지 자료가 너무 없어 다른 소재로 바꾸었다.

1970~90년대는 대한민국에 있어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대였고 그에 따라 사회 전반에 있어 다양한 문제와 오해들이 있었다. 최근들어 과거 유죄 판결이 났던 사건들이 대거 무죄로 번복되면서 당시의 수사, 재판 과정이 올바르고 투명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는데 이번 <서울 노량진 살인 사건> 역시 "그런 맥락이 아니였을까.."하는 기대와는 달리 한 범죄자의 삐뚤어진 심리가 만든 사건일 뿐이었다.

 

 

 

이미 성범죄 전력이 있던 박형택, 여고생을 부천 인근 야산에서 강간 임신시키다

 

30대 남성 박형택은 1986년 9월 여고생이던 석O양을 부천의 한 야산으로 끌고가 강간, 임신을 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석양의 부모로부터 고소를 당한 그는 합의가 되지 않는 등 여러 문제로 인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하게 된다.

1980~90년대만 해도 시대상이 지금보다 더 보수적이었고 그런 것들을 떠나 자신의 딸이 강간 당했는데 이를 합의를 통해 용서를 해 줄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 여고생을 강간 임신시킨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복역하게 된 박형택.

 

 

반성을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박형택은 자신의 합의를 무시하고 수감 생활을 하게 만들었다며 피해자 가족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고 출소 후 보복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1989년 12월 출소한 그는 곧바로 당시 석양이 다녔던 고교로 찾아가 주소를 알아내고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 번호를 이용해 주소지를 확인한다.

독산동을 거쳐 노량진 2동으로 이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박형택은 3~4월 두 차례 석양의 집 근처를 답사하면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당시에는 졸업앨범에 전화번호, 집주소 등이 기재되어 있었고 지금보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컸다고 해야 하나, 개인 정보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고 해야 하나...아무튼 조금의 정보만 있어도 쉽게 주소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기로 작성되던 개인정보 등이 모두 전산화로 교체되었고 그 과장에서 개인정보에 대한 보안 인식이 강해졌다.

 

 

 

1990년 6월 보복 범행에 나서다

 

당시 사건 현장 사진 / 인터넷

 

 

박형택은 50cm 정도의 회칼을 준비해 석양의 집으로 찾아간다. 

당시 집에는 석양의 어머니, 오빠, 그리고 놀러 온 석양 어머니의 친구 등 3명이 있었다고 한다. 박형택은 친구와 함께 대화를 하며 빨래를 정리하던 석양 어머니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곧바로 잠을 자고 있던 오빠와 석양 어머니 친구에게도 흉기를 휘둘러 중태에 빠뜨린 후 도주한다.

 

석양은 당시 집에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보아 박형택이 원한을 품은 것은 석양이 아닌 그의 부모였던 것 같다.

만약 그가 석양을 비롯해 가족 전체에게 원한을 품었다면 가족이 다 모인 시간대나 석양까지 포함해 범행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전답사까지 할 정도로 치밀하게 계획한 그였으니 석양의 귀가 시간 등을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였을 테니 말이다.

 

 

사건을 보도한 신문지면 / 네이버

 

 

백주대낮에 그것도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가정집에 침입해 살인을 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경찰은 금품이 사라지거나 그런 것이 없는 걸로 보아 금품을 노린 강도의 침입이 아닌 원한에 의한 사건으로 보고 수사에 돌입한다. 전과자 위주로 수사를 하던 경찰은 피해자의 딸 석양이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박형택을 용의 선상에 올린다. 그리고 당시 강간 사건을 담당했던 부천경찰서와 공조를 통해 광범위한 수사를 하게 된다.

박형택이 서울 모처의 한 독서실에 은거해 있다는 사실을 접한 경찰은 독서실을 급습, 격투 끝에 박형택 검거에 성공한다. 

 

하지만 박형택은 범행만 치밀하게 준비했던 건 아니였다. 범행 전 이미 어느 정도 목돈을 모아놓은 그는 곧 변호사를 선임, 사형을 피할 준비까지 해놓았던 것. 이미 전과자였던데다 보복 살인이라면 당시의 시대상에서 볼 때 그는 100% 사형이 선고될 것이 분명했었다. 또한 그 당시만해도 사형 선고를 받게 되면 집행이 이루어지던 시대였던 만큼 박형택은 사형을 면하고자 했을 것이다.

 

 

 

범인 박형택이 스스로 자살하면서 사건은 끝이 난다.

 

 

| 끝까지 삐뚤어졌던 범죄자 박형택, 끝내 스스로 자살

 

박형택은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형을 피하고 실형을 살게 되면 출소 후 담당 수사관에게 복수 할 다짐을 하게 된다. 끝까지 반성이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피해자와 경찰이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고 생각한 듯 하다.

하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그것을 표출한 대상을 찾지 못한 그는 서울 구치소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 결국 해당 사건은 종결되고 만다.

 

사실 1980년대, 90년대에서 성범죄는 지금보다 다소 관대한 측면이 있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도 "스스로가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니 그런거지."라는 사회 시선과 피해자들의 인식이 있던 터라 지금처럼 성적인 문제에 조금만 연관돼도 인생이 파멸되는 시대까지는 아니였다.

 

만약 박형택이 3년을 살고 나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하고 반성하며 살았다면 적어도 그는 지금쯤 평범한 노년 생활을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이미 전과 3범이나 됐다면 교화는 틀린 셈이지...

그것도 동일 전과로만 그렇다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