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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은 이야기

콩국수의 유래, 여름철 서민들의 별미

여름철 대표 음식 콩국수

 

 

여름철이 되면 각종 보양음식이 하나 둘 식당 메뉴에 자리를 잡는다. 복날에는 주로 삼계탕을 먹지만 가정에서는 콩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나도 어릴 적 어머니가 "콩국수 해줄까?"라고 하셨지만 나는 콩국수를 싫어하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 원래 면 음식을 싫어하는 편이다. 라면 빼고.

그래도 국물은 마시는데 시원하고 고소한 맛이 딱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콩국수를 먹게 됐을까.

 

 

 

콩국수의 기록은 거의 없지만 조선 말기에 기록 있다, 잣국수와 깻국에서 유래?

 

흔히 알려진 이야기로는 잣국수가 콩국수의 유래라고 알려졌지만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이는 조금 틀린 듯 하다.

1800년대 말엽에 작성 된 '시의전서'에 그 기록이 있다고 한다. 작성된 것은 말기이나 현재 전해지는 건 1911년에 발행 된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콩을 물에 불려 갈아 데친 다음 소금으로 간을 한 후, 밀국수를 깻국처럼 고명을 얹어 먹는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는 조금 의아한 면이 있다. 밀가루는 진가루로 불리던 조선 시대에 매우 귀한 음식 재료였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의 민가에서 손쉽게 해먹을 수 있는 요리는 아니였다.

 

 

콩국수의 유래는 잣국수라는 말이 있으나 실제로는 깻국이라고 한다. 잣국수와 깻국의 모습

 

 

그럼 잣국수는 어떠했을까.

가평은 옛부터 잣이 특산품일 정도로 잣의 고장이었다. 얼마나 맛이 뛰어났으면 신라시대에서도 잣은 대단한 수출품목이었다고 하며 조선실록에도 가평 잣의 맛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잣국수는 경기도 가평의 향토 음식이지만 당시에는 고을 현감도 쉽게 먹기 힘들 정도로 역시 고귀한 음식이었다고 전해진다.

콩국수보다 더 담백하고 고소함이 진하다고 알려졌으며 훨씬 맛있다고 한다. 요즘 잣국수를 하는 곳도 많지 않지만 한 그릇에 12,000원~15,000원 정도라고 하니 지금도 그리 서민적인 음식이라고는 하기 어려울 듯 하다.

 

그렇다면 깻국은 어떠했을까.

깻국은 백마자탕(白麻子湯)이라고도 하는데 어린 암닭을 고아 둔 국물에 껍질과 고기를 찢어놓고 볶은 깨를 갈아 함께 넣은 후 미나리, 버섯, 오이채를 살짝 데쳐 넣어 먹는 삼복 음식이라고 전해진다. 간혹 깻국을 '임자수탕'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잘못 된 것이라 한다. 들깨냐 참깨, 횐깨냐에 따라 명칭이 다른 것인데 깻국은 참깨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깻국은 19세기 조선 양반들이 즐겨먹던 것으로 '동국세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콩국수는 조선 후기 백성들이 양반들의 여름 보양식을 따라 만든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각종 문헌이나 기록서에 콩국수에 대한 내용이 거의 없는 것이다. 

 

 

 

여름철에는 콩을 갈아 콩국물을 음료나 식사 대용으로도 활용했다고 한다.

 

 

선조들이 즐겨 마시던 콩국, 한끼 식사 대용으로도 그만이었던 서민적인 음식

 

잣이나 밀가루는 비싼 재료였지만 콩은 조선시대에 널리고 널린 음식 재료였다고 한다. 콩은 알려진대로 그 효능이 매우 좋은 식품으로 가난한 선비들이나 민가에서 즐겨 먹었다고 알려졌는데 특히 콩국물은 선비들에겐 시원한 여름철 음료로, 민가에서는 배고픔을 달래 줄 식사 대용으로 먹었다고 전해진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도 식량이 떨어져 궁핍해지는 춘궁기가 되면 콩국물을 즐겨 드셨다고 하니 얼마나 서민적인 음식인지 잘 알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의 여름은 어떠했을까.

 

 

| 깻국은 자취를 감췄지만 콩국수는 지금 모두가 즐겨찾는 음식

 

아마 조선시대의 백성들은 콩국물에 메밀가루나 감자로 만든 국수를 넣어 먹었을 것이다. 얼음 역시 귀하던 시기이니 지금처럼 얼음을 동동 띄워 먹지도 않았겠지만 시원하게 여름을 나자는 마음만은 변함없을 듯 싶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만 해도 우리의 선조들은 창호지문을 열고 부채나 죽부인만으로 이 여름을 이겨냈을 것이다.

 

여담으로 "조선 시대에도 지금같은 폭염이 있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현대사회는 지구온난화, 이산화탄소, 에어컨 사용 등으로 엄청난 폭염이 일상화됐지만 그런 기기들이 없고 순수한 자연 상태였던 조선시대에도 과연 이런 더위가 있었는지 말이다.

 

찾아보니 있긴 있었다. 지금처럼 기온 표기가 없으니 얼마나 더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1484년 (성종 15년)의 기록을 보면 "더위로 고통받는 수감자들이 늘어나자 임금이 직접 강력 범죄자를 제외한 수감자를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경범죄를 조사받기 위해 옥문에 갇혀 자칫 억울하게 목숨을 잃게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며 보방(保放)을 지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방은 지금의 불구속 수사와 같은 개념이라 한다.

 

또 1794년 (정조 18년)의 기록을 보면 당시 화성지역 공역 현장에서 감독 관리를 하는 관리와 인부들이 더위로 고생을 하자 더위에 좋은 약 4,000정을 조제해 지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나와 있다.

 

아무튼 우리 조상들의 지혜는 참 놀랍고 대단하다.

교통이나 정보 습득이 쉽지 않은 그 옛날에도 이러한 지혜를 통해 무더위를 이겨냈다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