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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영원한 젊은 오빠 - 임하룡

디너쇼 당시의 임하룡

 

 

내가 좋아하는 코미디언, 배우 중에 한 명이 바로 코미디언 출신 배우 '임하룡'이다.

선하고 아버지같은 푸근함과 인자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인상이 참 좋다. 임하룡 하면 많은 키워드가 떠오르겠지만 나는 그 흔한 사건 사고 한번 없던 연예인이라는 점도 매우 마음에 든다.

사실 임하룡은 지금이야 배우로의 삶을 살아서 그렇지, 과거 80~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코미디계의 핵심 멤버 중 한 분이셨다. 물론 이 분의 코미디도 주도적인 것보다는 "받쳐주는 역할"을 주로 하셨지만.

그럼에도 최고의 코미디언이라는 찬사를 받는 코미디언은 개그맨 포함 거의 없었다. 그만큼 뛰어났다는 증거일 것이다.

 

 

코미디언의 최고에 오르기도 했다. / 이미지 자료: MBC

 

 

본명은 임한용, 왜 임하룡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부르는 어감이 비슷해서 그리 된 게 아닐까 싶다.

1952년생으로 충북 단양이 고향이다. 데뷔는 1981년 KBS 프로그램 <즐거운 토요일>이다. 당시에는 토요일도 학교를 가고 또 오후까지 근무를 하던 시기라 토요일이 정말 즐겁기는 했을 것이다.

 

임하룡의 본가는 원래 여유로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농협에 근무 중이던 부친이 서울 마사회로 직장을 옮기면서 임하룡 가족은 서울로 상경한다. 부친은 서울 상경 당시 임하룡에게 "앞으로는 강 건너도 개발될 수 있으니, 훗날 돈을 벌면 땅을 조금 사두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임하룡은 1991년 코미디언 활동으로 착실히 모은 돈 6억을 들여 지금의 신사동 건물 부지를 매입했다. 이때만 해도 6억이면 엄청 큰 돈이었다.

 

 

젊은 시절 코미디언의 최고들과 함께

 

 

1. 밤무대 MC에서 코미디언이 되다.

 

부친의 사망으로 집안 형편이 기울자 그는 한양대 연영과 1학년 때 자퇴를 한다. 그리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밤무대 MC로 취직을 하는데 이때 전유성을 만나게 된다. 당시 코미디언들의 인기는 그 어느 연예인들보다 최고였고 이를 계기로 임하룡은 KBS 특채 코미디언으로 연예계에 입문하게 된다. <변방의 북소리>, <청춘을 돌려다고>, <내일은 챔피언>, <추억의 책가방> 등 심형래와 함께 출연한 코너들은 모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임하룡은 후배들에게도 좋은 귀감이 되는 선배였다고 말한다. 요즘은 많이 개선됐지만 그때의 코미디언, 개그맨들은 서열과 군기 문화가 굉장히 엄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이가 위라고 해도 기수로 대우했기 때문에 어린 사람이라 해도 기수가 높으면 무조건 존칭과 심부름을 맡아야만 했다.

 

1990년대에 들어 코미디언과 개그맨으로 명칭이 양분되던 시기 즈음해서 터진 사건이 "감자골 4인방 사건"이었다.

감자골은 신인 개그맨들이었던 김국진, 김용만, 김수용, 박수홍 4인방을 지칭하던 지금으로 말하면 프로젝트 팀이었다. 데뷔한 지 얼마 안된 이들은 1990년대 초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소속사가 아닌 공채를 한 방송국 소속이었다.

그래서 PD의 권한이 막강하던 때였는데 인기가 있다보니 여러 프로그램에 겹치기 출연을 종용했고 감자골 4인방은 PD에게 과하다고 사정했지만 묵살됐다. 그리고 김용만이 과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맏형뻘이던 김국진의 주도 아래 이들은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를 감행했다.

 

방송 3사의 코미디언, 개그맨들이 모두 이들을 비난할 때 나서서 이들을 도와 준 이가 바로 임하룡과 이경규였다.

임하룡은 당시에도 군기 문화에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던 터라 후배들에게도 엄한 군기를 잡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많은 개그맨 후배들이 임하룡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에 있었다.

 

 

 

2. 코미디언에서 배우로 전향하다.

 

임하룡은 1985년도부터 종종 영화에도 모습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그때는 코미디가 한창 인기를 구가할 때여서 영화배우라기 보다는 인기에 힘입어 만든 코믹 영화에 당연히 나오는 그런 형태였다.

몸과 표정 등 행위로 웃음을 주던 슬랩스틱 코미디는 1990년대 중반부터 점점 대중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했다. 이즈음 임하룡도 설 자리를 잃게 되자 그는 배우로의 전향을 꿈꾼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2004년 영화 <아는 여자>에서 반장역을 시작으로 그녀를 믿지 마세요, 아라한 장풍 대작전, 범죄의 재구성 등에 얼굴을 보였고 2005년 그의 인생작 <웰컴투 동막골>에서 인민군 하사역을 맡으며 배우 임하룡으로 거듭났다.

주연은 힘들지만 조연으로 영화에 계속 출연해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연기로 이제는 확실한 주연급 조연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영화의 재미를 살려주는 역할로 우뚝 섰다.

 

 

서울 신사동에 있는 임하룡 빌딩, 거주 겸용이다.

 

3. 평생을 바쳐 모은 재산, 신사동 빌딩

 

코미디언으로의 화려한 삶, 영화배우로의 활동. 데뷔 후 약 40년을 대중들의 사랑으로 먹고 살아 온 연예인치고는 재산이 소박(?)한 편이다. 물론 현금 및 여러 가지 자산이 있겠지만 그의 재산으로 알려진 것은 현재 주거 겸용으로 세운 신사동 꼬마 빌딩이 전부라고 한다. 1991년 부지를 매입했고 2000년도에 들어서야 지하1층, 지상 5층으로 된 총 6층짜리 꼬마 빌딩을 세웠다.

지금은 옥상은 주거용으로 만들어 거주중이고 지하 1층은 소원하던 카페를 만들어 신인가수나 개그맨들의 설 자리로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이 빌딩의 가치는 약 40억원 정도로 보고 있지만 주변 상권과 향후 개발 입지 등을 놓고 보았을 때 50억의 가치가 있다고 부동산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단다.

 

 

4. 악당역할도 해보고 싶은 배우 임하룡, 그리고 아버지 임하룡

 

임하룡은 더 다양한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그럼에도 매번 선한 역할만 들어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했다.

그가 줄곧 맡아온 배역들만 보아도 제작자들이 그에게 제안하는 역할은 주로 그런 건가 보다.

하긴 외모 자체가 독하지 않은데다 코미디언 출신이다 보니 주로 약한 시민이나 선한 역할이 들어올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진지한 역할은 맞지 않을 듯.

 

 

 

그의 아들 임영식씨도 현재 영화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 소년은 울지 않는다 >, < 고고 70 >, < 퍼펙트 게임 > 등 5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아직은 무명에 가까운 배우이다. 지금은 아버지 임하룡과 함께 같은 소속사에 소속되어 있다.

임하룡은 아들이 영화 배우의 길로 들어선 것이 자신의 영향도 있을 것이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된다라고 늘 조언했다고 한다. 또한 아직은 배우로서 빛을 못 보는 아들에게 "아직은 때가 아니니 기다려야 한다."라는 아버지로서의 조언도 잊지 않는다고 한다.

 

 

방송생활 40년. 한때는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웃음을, 그리고 지금은 배우로써 재미를 주는 유쾌한 에너지를 주시는 임하룡 아저씨의 앞으로도 기대가 된다. 늘 응원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