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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X파일

대한민국 엽기살인 ① '우범곤 총기 난동 사건'

우범곤 순경의 모습

 

엽기적, 연쇄살인은 해외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겠지만 1982년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최단 시간, 최대 희생자 발생>이라는 기가 막히고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른바 '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 사건'이 그것이다.

일단 국민의 안전과 치안을 지켜야 할 경찰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데 당시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하긴 하룻밤 새에 몇 개의 마을을 돌며 총과 수류탄을 들고 광란의 살육판을 벌였으니 그럴만도 하겠다.

이 미친 광기는 범인 우범곤이 자살하면서 끝을 맺었다.

 

먼저 우범곤 순경은 어린 시절에는 평범했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조금씩 내성적으로 성격이 변하더니 고교 때 부친의 사망으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완전히 삐뜰어졌다고 한다. 고교 때 장기 결석으로 제적을 당했고 해병대에 입대한 그는 특등 사수로 선발 될 만큼 총을 잘 쐈다.

1980년 12월. 순경 공채 시험에 합격해 경찰이 된 그는 서울에서도 근무를 했지만 곧 의령군 궁류지서로 발령을 받아 내려왔다.

그와 함께 근무를 했던 동료 순경의 말에 의하면 평소엔 얌전했지만 술만 마시면 난폭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냈다고 한다.

 

 

당시 생존자의 증언 / 출처: KBS

 

1. 사건의 발단

 

지금까지는 우범곤 순경이 당시 동거하던 전모씨가 파리를 잡다가 실수로 때린 것 때문에 시발이 되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고 한다.

물론 전모씨가 때린 것 때문에 발동이 된 건 맞지만 그 이전에는 짝사랑하던 전화 교환원 박모씨 때문이라는 것.

당시에는 전화를 걸기 위해 반드시 교환원이 이를 중간에서 교환해주어야만 통화가 가능했다. 말단 순경이자 보잘 것 없는 우범곤을 교환원 박모씨가 냉정하게 거절했고 이에 불만이 팽배했다는 것이 당시 생존자의 증언이다.

 

아무튼 전모씨, 그리고 그녀의 친척들과 한바탕 몸싸움을 한 우범곤은 곧 자신이 근무하던 궁류지서로 가게 되는데, 이때 전모씨의 남자 친척이 따라와 "왜 행패를 부리느냐?" 라며 강력하게 따지고 우범곤은 "꼭지가 돌아 그런 거 같다."라며 얼버무린다.

그리고 당시 지서 내 총기함을 지키던 방위병들의 만류에도 그는 카빈 소총 2정, 실탄 180발, 수류탄 7발을 탈취해 나온다.

 

일단 그는 외부와의 연결망을 단절 시킬 목적으로 우체국으로 향하는데 이것으로 보아 술에 만취해 저지른 것만은 아닌 듯 하다.

당시 교환원 2명, 숙직실에서 취침 중이던 집배원 등을 사살하는데 성공한 그는 이제 마을을 돌아다니며 광란의 살육을 벌이기 시작한다.

 

 

1960년대 전화 교환원들의 모습

 

 

2.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사건 

 

사실 이 사건의 정확한 피해 희생자 수는 불분명하다. 당시 언론마다 다르게 발표를 했고 지금까지도 의견은 분분하다.

대략 60명 정도 희생되었고 부상자만 33명에 이른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자.

먼저 우범곤이 총기류를 탈취할 때 방위병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충분히 제지하려면 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한 사건이 도내 경찰서에 알려졌을 때도 "우 순경을 사살해도 된다."는 지시가 하달됐지만 당시 진압대는 우범곤과의 총격전이 두려워 적극적인 진압을 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희생 된 마을 주민들

 

 

3. "모두 죽이겠다." 광란의  질주

 

아무튼 우범곤은 동거녀 전모씨와 그 일가족을 몰살하고 구애를 거절한 박모씨와 그 가족도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 인근 마을로 가 지나가던 학생을 대동하고 구멍가게에 들러 콜라를 마시는 여유를 보였지만 이윽고 학생과 가게 내 있던 일가족을 모두 사살한다. 총 4군데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총기를 난사, 주민들을 살해해 나갔다. 그리고 잠시 그는 한 상갓집에 들러 조의금 3천원을 내고 술상까지 받았다.

당시 그를 처음 발견한 상갓집에서 잠시 진정을 하는 듯 했지만 상갓집에 조문 온 조문객과 말다툼이 벌어졌고 그는 상갓집을 초토화 시켜버린다.

물론 다행히도 몇몇의 조문객은 대피를 해 목숨을 건졌지만 말이다.

 

아침까지 광란의 질주를 벌인 우범곤은 이내 한 가정집에 들어가 "간첩 소탕 작전 수행 중"이라며 안심을 시켰고 얼마 뒤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신은 물론 방 안에 같이 있던 가족 3명과 폭사했다. 그것으로 광란의 살육전이 막을 내렸다.

 

 

현재의 궁류 치안센터와 옆에 있는 우체국

 

이 사건으로 당시 내무부 장관 및 경찰서장 등 대다수의 관련자가 모두 옷을 벗어야 했고 노태우가 내무부 장관에 오르게 되면서 정치계에 입문하게 된다. 이제 어느덧 그 사건도 37년이나 지나버려 지금은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진 않지만 아직도 그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주민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다. 자격지심으로 시작 돼 10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역대 끔찍한 살인 사건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