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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슈

충무공 이순신 장군 장검 및 유품 4종, 국보로 승격 지정되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李舜臣)  1545 ~ 1598

 

 

" 방패로 나를 가리라. 지금은 싸움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

 

선조 31년이던 1598년 12월 16일. 남해현 노량해협 인근 판옥선 선상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조선수군의 제독으로써 전투 도중 전사한 것이 알려지면 군의 사기와 일본 왜구들의 침략이 들끓을 것을 염려한 장군이었다.

물론 당시 이미 승기를 잡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 굳이 퇴각하는 왜선을 따라갔는지에 대해, 그리고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들을 왜 거둬들였는지에 대해선 지금도 여러 학설들이 있다.

 

다만 일각에선 당시 왜란이 막바지로 접어들었음을 알고 있던 이순신 장군께서 자신을 시기한 임금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음모 속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알고 군인으로 명예롭게 전장에서 스스로 죽기를 바란 것이 아니였을까 하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전 유품 4종이 국보로의 승격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장군의 전장 당시를 기록한 '난중일기'는 이미 국보로 지정되어 있지만 생전 실제로 사용했다고 알려진 장검과 잔 등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을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그리고 장군의 실제 키에 대한.

 

먼저 이순신 장군께서 사용하셨던 장검의 길이 때문에 당시 이순신 장군의 외모, 키 등이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실제 여러 기록서에 이순신 장군의 용모에 대해 기록된 바는 있지만 키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현재 현충사에서 볼 수 있는 장군의 초상화 ( 맨 위의 초상화 참고 )는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으로 1973년 표준 영정으로 지정된 것이다. 근엄하면서도 인자한 용모를 느끼게 하지만 실제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의 외모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였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고위직을 지낸 인물들은 저마다 초상화가 있어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도 실제했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만 한국전쟁 때 어진들이 많이 도난, 분실, 훼손 된 것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도 소실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여수 충민사에서 보관 중이던 당시 이순신 장군의 실제 초상화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소실됐고 그 직전에 사진으로 찍어 둔 초상화가 공개 된 적은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진짜 초상화로 알려졌던 초상화 원본 사진, 이상범 화백이 진품을 보고 따라 그린 작품과 1919년 그것을 보고 그린 작품

 

 

실제 초상화를 보고 따라 그렸다고 평가되는 이상범 화백의 초상화가 사진과 비슷한 것을 보면 아마도 사진 속 초상화가 실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아니였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1919년 영국에서 온 여성화가 엘리자베스가 그린 초상화는 이상범 화백의 작품을 보고 따라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실록이나 당시 기록서에 적힌 사실들은 모두 이순신 장군을 시기하던 무렵 작성됐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적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외모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였다는 점이다.

 

생전 이순신 장군과 유년기를 한 동네에서 같이 보냈고 훗날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만났다고 알려진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용모에 대해 " 단아하고 정갈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한산도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난 문신 고상안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 그는 말솜씨와 명석함은 재난을 평정할 재주이지만 풍채가 풍만하지도, 후덕하지 않고 입술이 뒤집힌 것이 복이 있는 관상은 아니다. "라고 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실제로 사용했다고 알려진 장검을 살펴보고 있다. 현재 이 검들은 보울로써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관 중이다.

 

 

또 하나의 이슈는 바로 이순신 장군의 키이다.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다는 장검의 길이는 총 197cm. 약 2m에 달한다. ( 무게는 약 4kg 라고 한다. )

조선시대 남성의 평균 키가 157cm ~ 163cm 였음을 생각한다면 사실 키보다도 훨씬 긴 검을 사용했다는 말이다.

현재 180cm의 건장한 남성이 휘두르기에도 버거운 이 장검을 이순신 장군을 가까이 두고 활용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순신 장군의 키는 과연 얼마였을까 하는 관심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현재 인터넷에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장군의 키는 180cm 대라는 설과 2m가 넘었다는 설이 가장 많다.

과거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지금보다 작았던 것은 아니다. 실제 기록에 보면 과거 공자는 키가 9척 7촌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지금으로 환산하면 2.5m가 넘는 신장이다. 또한 국내 기록에도 키가 큰 역사적 인물들이 더러 있다.

신라 28대 군주였던 진덕여왕, 조선의 태조 이성계, 정조 등 많은 역사 인물들의 키가 컸다고 알려졌다.

 

과거에서 사용 된 척도 기준을 보면 주로 '척'과 '촌'을 사용했는데 1척을 지금으로 환산하는 기준이 좀 다르다.

어떤 기록에서는 1척을 23cm로 봐야 한다고 하고 어떤 기록에서는 30cm ~ 33cm로 환산해야 한다고 한다.

혹자들은 " 당시 장군의 키가 6척 장신이었다고 한다. "라고 하는데 이것을 앞의 기준으로 보면 138cm로 당시 키로 보면 장신 축에는 들 수가 없고 뒤의 기준으로 보면 180cm가 넘는 장신에 포함 될 것이다.

 

다만 당시 인물에 대해 기록하는 내용들을 유추해봤을 때 기골이 장대하거나 풍채가 뛰어났다면 반드시 그에 대해 언급이 있었을텐데 그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순신 장군의 키는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몇몇 야사나 기록에서 장군의 체구가 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모두 후대에 적힌 것이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주 개인적인 추론이지만 TV에서 방영 된 다큐멘터리, 여러 정보들을 종합해 보면 이순신 장군의 키는 약 165cm ~ 170cm 사이가 아니였을까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당시로 보면 작은 키는 아니고 평범해보였을 키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근거는 있다.

장군이 무과에 떨어진 배경은 바로 말에서 떨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도 군마는 가장 중요한 국방 자원이었다고 한다. 특히 제주도는 군마를 집단으로 양성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고 알려졌다.

당시 조선의 말들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말들에 비해 그 크기가 다소 작았다고 한다. 쉽게 보면 말과 당나귀 사이의 중간 크기 정도로 보면 될 듯 하다. 그런 말에서 낙마해 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부상을 당했다면 키가 그리 크진 않았다고 보는 편이 맞지 않을까 싶다. ( 당시 사람들에겐 그 정도의 말도 컸겠지만 )

 

 

 

이순신 장군 동상,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 위인 중 한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 장군의 외모, 풍채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나. 그의 호국 정신과 용맹함만으로도 충분히 위인

 

이슈가 되기에 나름 포스팅을 작성해봤지만 사실 이순신 장군의 용모나 풍채가 그리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탁을 했고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 시기와 질투 때문에 변방을 전전하다 뒤늦게 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평생 위장병에 시달렸고 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고통 속에서 지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나라와 임금을 충심으로 섬겼고 백성과 부하들을 위해 헌신했다. 군인이었기에 때론 엄격했지만 장군의 휘하 부하들은 물론 왜구의 적장들도 모두 장군을 존경했었다고 하니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이순신 장군은 덕수 이씨 12세손 (德水 李氏)으로 13세손인 율곡 이이와도 같은 집안 사람이다.

율곡 이이를 파조로 하는 문성공파와 이순신 장군을 파조로 하는 충무공파가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충무공파는 그 후 무과급제자만 총 267명을 배출했고 그 중 역대 삼도수군통제사만 13명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무신 집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