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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은 이야기

한국 경제 과거사 ① | 석유 파동(oil shock) 1970년 ~ 1980년

2차 오일쇼크 당시 미국 주유소에 기름을 사기 위해 줄이 늘어선 모습

 

 

 

 

흔히들 오일쇼크(석유파동)라는 말을 TV뉴스나 부모님에게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1973년 아랍권 국가들이 연합해 일으킨 '자원의 무기화 정책'인 이 오일쇼크는 기존 무기에 의존해 싸움을 벌였던 전쟁의 양상을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는 전례를 남기기에 충분했다.

요즘에는 이런 단어들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경제 성장의 격동기였던 1970년대에는 자주 사용됐던 말이다.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이 후진국, 개발도상국 지위에서 고군분투하던 시기로 그나마 대한민국은 특유의 악바리성 절약 정신으로 아시아 경제성장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하고 있던 시기였다.

 

오일쇼크의 시작은 중동전쟁에서 참패를 한 아랍-중동권 국가들의 복수심에서 시작됐다. 물론 3차 중동전쟁 당시 아랍권 산유국 집단인 OPEC가 석유 무기화를 추진한 적이 있었으나 오히려 시장점유율을 상실당하며 크게 손해를 본 적이 있었지만 4차 중동전쟁 후에는 달랐다. 이것이 1제1차 석유파동(oil shock)이다.

그 동안 중동산 석유를 굉장히 저렴한 가격에 판매됐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은 석유 공급에서 자유로웠지만 OPEC의 석유 무기화 정책에 따라 크게 휘청거리게 됐다. OPEC는 가격을 올리고 석유 생산량은 줄이는 정책으로 가격을 순식간에 2배 이상 올려놓았고 석유 공급에 차질을 우려한 일부 선진국들이 사재기에 들어가면서 가격은 10배 이상 뛰었다.

 

 

 

 

경제성장기의 대한민국, 직격탄은 피했지만 고군분투

1973년 당시의 대한민국 용산의 모습,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되던 모습이다.

 

 

 

 

OPEC는 이스라엘을 지지했던 국가들에게는 가혹했지만 아랍권을 지지했던 국가들에겐 그나마 관대하게 정책을 조정했기에 대한민국도 직격탄은 피할 수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故박정희의 제일 관심사는 경제성장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눈치에도 아랍권을 지지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난한 동양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은 오일쇼크의 여파에 휘청거릴 수 밖에는 없었다. 전국적인 ' 아껴쓰기 운동 '이 벌어졌다.

요즘 시대의 사람들 같으면야 아랑곳하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이 가득했던 시대였다.

어찌보면 국가정책에 맞춰 "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는 마음들이 하나가 됐던 시대였던 것 같다. 이때 우리나라도 쌀밥에 고깃국 한번 먹어보는 게 소원인 국민들이 꽤나 됐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가난했던 시대였다고 한다.

 

 

 

차량 운행제, 사재기, 석유를 사기 위해 몰려든 어머님들, 정부기관의 형광등 제거 시행까지 다양한 모습이었다.

 

 

 

오일쇼크로 물가가 순식간에 요동을 치자 국민들은 불안한 마음에 생필품 사재기에 나섰고 이런 현상은 물가의 폭등을 불러왔다. 공급에 비해 수요가 넘쳐나니 물가가 뛰는 것은 당연한 시장의 원리이다.

당시만 해도 아파트는 우리나라의 주요 거주 형태가 아니였기 때문에 주부들은 석유통을 2~3개씩 들고 2~3km를 걸어와 석유를 사기 위해 노력했고 정부도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기관 내 형광등 일부를 제거하는 등 절약 캠페인이 벌어졌다.

 

 

 

시장 상인들도 오르는 물가에 걱정이 많았던 1970년대의 대한민국

 

 

 

| 1990년대 초반에도 석유파동 있었지만 슬기롭게 넘겨

 

1990년대에 들어서 우리나라는 굉장한 발전을 경험하게 됐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대한민국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렸고 한국인 특유의 성실성, 절약정신으로 경제 성장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배고픔을 잃은 우리나라는 조금씩 서양의 문물에 빠져들게 되고 하나 둘 흥청망청 사치를 즐기는 부류들이 강남권을 중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오렌지족의 탄생이다.

 

1992~93년즈음 한번 더 석유파동이 있었다. 당시 차량운행 10부제가 시행됐고 홀짝수제도도 시행됐다.

또한 밤 9시가 되면 대부분 가정에서도 등화관제를 실시, 에너지 절약에 동참했다. TV방송국들도 화려한 조명, 연출을 자제하는 등 범국민적인 절약 운동이 또 한차례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 당시까지가  < 응답하라. 1988 >같은 정이 넘쳤던 시대가 아니였을까 한다. 

이웃과 적어도 인사와 반찬 교류가 있었던, 그리고 함께 식사 정도는 같이 하던 그런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