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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은 이야기

한국 경제 과거사 ② | 제2의 국치일 IMF (국가부도)

제2의 IMF 위기설이 대두되고 있지만 벌써 우리는 1997 IMF를 잊은 듯 하다.

 

 

 

 

나라 빚 1,000조 시대. 어떤 나라는 국방예산인 이 거액이 빚인 나라가 있다.

바로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고 선진국이라 자화자찬에 빠진 대한민국이다. 지금도 IMF를 언급할 때마다 "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왜 걱정하고 있냐? "라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지만 바로 그런 안일함이 정작 경제 위기가 왔을 때 나약하게 대처하는 무책임이라는 것에는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이다.

물론 IMF 사태를 일개 국민 몇몇이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97년 IMF를 겪어 본, 지켜 본 사람이라면 그 당시가 얼마나 지옥같았는지 잘 알 것이고 쉽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당시 고교생이던 내가 IMF를 직접 격어 본 것도 아니고 당시 우리 집은 IMF 여파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크게 체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위에서, 친구 집들을 보면서 빚을 진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혹자들의 말대로 " 네가 걱정한다고 올 게 안 오냐. "는 아니지만 문제는 우리나라에 닥쳐오는 대부분의 재난과 위기는 정치인들이 만들고 국민들이 책임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안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당시 스스로 생을 접은 분들이 IMF가 오는데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IMF 1997, 발생원인

국제통화기금 : 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

 

 

 

 

1997년 IMF가 한국에 온 것은 굉장히 단순한 이유에서다. 영화 <국가부도>에서 나온 것처럼 기업과 정부의 방만한 경영이 불러 온 비극이다. 우리나라는 1997년 초까지만 해도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강한 나라였다.

요즘처럼 직업군이 다양하고 비정규직, 계약직이이 없던 그야말로 고교, 대학 졸업 후 회사에 입사하면 어중간해서는 해고를 당하지 않고 평생 그 곳에서 일을 하다 정년을 맞이하는 평생직장.

그래서 지금도 60대 이상의 세대들은 " 왜 이렇게 회사를 자주 옮겨? "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살던 시절에는 볼 수 없던 현상이니 말이다.

 

딱히 기술, 재능이 없어도 성실하고 정직하기만 하면 인정받던 우리나라는 부채를 껴안고 기업을 확장하는 일들이 많았다.

기업의 규모가 곧 기업의 가치로 여겨지던 당시였기에 많은 기업들은 무리한 확장을 지속했다.

또한 한국경제의 전설로 불리던 故정주영 회장의 말처럼 "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는 그 시대에는 빚을 지고 기업을 일으키는 시대이기도 했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10%의 고성장을 배경으로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깊은 자만심에 빠져들었다.

막무가내식 "하면 된다."는 인식이 만연했고 무리한 도전이 곧 패기와 열정으로 비춰졌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OECD 가입 1년만에 경제 위기라는 성적표를 받아들게 된다.

 

 

 

 

만일에 대해 대비하지 못했던 1997년, 찾아 온 비극의 댓가는 참혹

1997년 IMF 당시 재계 30위 기업 중 11개 기업이 부도를 맞았다.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그야말로 초토화였다. 재계 순위 30위권 내의 기업들도 줄줄이 부도 사태를 맞았는데 대기업이 부도가 났다는 것은 그 하위에 있는 연결 된 하청기업, 중소기업 그리고 또 그 밑에 연결 된 영세기업들의 도미노 현상을 불러오는 게 당연했다.

대기업도 부도를 맞는 상황에서 중소기업에게 관대할 기업은 없었고 은행도 예외는 아니였다.

빌려 준 대금을 제때 상환받지 못하니 은행도 무너져 내렸다. 하루 아침에 해고자가 속출했지만 정부도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그만큼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 국민들은 위기에 안일했고 무방비했다는 뜻이다.

 

IMF라는 기구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된 국민들이 많을 것이다.

정부는 IMF 구제 금융을 받을지, 말지에 대해 고민을 했고 결국 외국의 압박에 못 이겨 IMF에 손을 내밀었는데 당시 IMF는 대한민국에게 가혹한 처방전을 내렸다. ( 추후 IMF는 이때에 대해 가혹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많은 가장들이 거리에서, 한강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하루에도 수 많은 극단적 선택 뉴스가 보도됐고 이때 대한민국 군 창설 이래 최고의 입영률을 보이기도 했다. 대학생, 재수생들은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앞다투어 입대를 신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