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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X파일

실미도 사건, 비겁하고 무능한 조국이 낳은 최정예 부대 ( 1971년 )

2003년 개봉한 영화 <실미도>, 안성기 / 설경구 / 정재영 등이 주연을 맡았다.

 

 

"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로 유명한 영화.

영화 <실미도>는 실제 일화이기도 하고 대한민국 분단이 낳은 비극이자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의 무책임함이 그대로 묻어난 사건을 기록한 영화이다.

기간병 6명이 생존했으며 실미도 부대원들은 모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에 발생됐다.

 

 

※ 포스팅에 사용 된 사진들은 인터넷 검색을 통한 자료들이며, 내용은 인터넷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 된 것

   입니다. 일부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는 점 양해바랍니다.

 

 

실제 실미도 부대원들의 모습 (좌), 기간병들의 모습 (우)

 

 

1. 부대 창설 배경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무장 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를 암살하고자 내려 온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자하문 초소까지 당도했으나 검문을 받던 도중 정체가 탄로났고 이에 경찰과 시민을 사살하고 달아났다.

국군의 대응으로 모두 사살되고 유일하게 김신조 ( 귀순 후, 개명해서 종교인이 됨 )만이 살아남았다.

김신조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는 말에 분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바로 이에 맞불작전을 지시하고 그렇게 탄생하게 된 부대가 바로 실미도 부대였다.

 

물자 배급은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담당하고 부대 관리와 훈련은 공군이 맡았다.

정식 부대명은 공군 제 2325부대 209파견대이며, 1968년 4월 1일에 창설됐다고 해서 소위 "684부대"로도 불렸다고 한다.

 

인원은 1.21사태와 마찬가지로 31명으로 구성, 영화에서는 모두 범죄자로 구성됐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일반인들로 구성됐다고 전해진다. 모두 "큰 돈을 벌게 해주겠다.", "미군 부대에 취직시켜주겠다."는 등의 말에 속아 입대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실제 실미도 훈련이라고 하는 사진들

 

 

2. 혹독한 지옥훈련, 창설 수 개월만에 인간 병기로 거듭나

 

대통령의 특별 지시, 그리고 특수 임무를 맡은 부대답게 684부대의 훈련은 엄청난 지옥 훈련이었다고 전해진다. 훈련 도중 심장마비, 익사, 폭행 등으로 사망자도 꽤 나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보고에 따르면 7명이 훈련 도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훈련이 힘든 만큼 초기 보급 수준은 꽤나 좋았다고 한다.

 

첫 출전이 잡혔지만 미국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던 당시 정부는 계획을 취소하고 그렇게 점점 시간을 끌면서 3년이 훌쩍 지나간다. 계속되는 훈련, 무기한 작전 취소, 수년째 외부와 단절 된 생활 등으로 부대원들은 물론 기간병들도 상당히 지쳐만 갔고 점점 불만이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1971년 8월 23일 오후 14시 15분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

 

 

3. 청와대로 가서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 부대원들은 기간병 18명을 사살하고 실미도를 탈출, 육지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시내버스를 탈취, 서울로 향하지만 한 차례 교전을 통해 다른 시내 버스를 다시 탈취하여 서울로 향한다.

당시 생존자이던 김방일 소대장은 이들의 청와대행에 대해 "작전 취소로 인한 처우개선이 문제였다."라고 말한다. 북한으로 침투해 임무를 완수해야 약속 된 처우와 돈 등을 받을 수 있는데 이미 주민등록까지 말소가 된 그들은 갈 곳이 없는 유령의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오후 14시15분. 대방동 유한양행 근처에 가로수를 들이박고 멈춘 버스에서 24명이 수류탄으로 자폭을 하면서 이 사건은 종결된다. 당시 처음에는 "무장공비"로 발표되었지만 이내 "군 수용자들의 반란"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4. 정말 당시 부대원 생존자는 없나?

 

당시 살아남은 4명의 부대원은 모두 총살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실미도>의 원작자로 알려진 백동호 작가는 "2명 정도는 살아남은 걸로 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백동호는 금고털이범 출신으로 복역 후 자신의 삶을 그린 소설 "대도"를 통해 베스트셀러가 된 작가인데 교도소 복역 당시 실미도 부대원 출신 복역자를 만났다고 증언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소내에서 굉장한 싸움꾼으로 인정받던 사람"이라며 그에게 실미도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집필 할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70년대 당시에는 신분 위조는 쉬운 일"이라며 "나 역시도 실제 내 이름으로 복역한 건 딱 2회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당시 생존자는 미국으로 밀항해 2000년 초반까지 종종 연락을 주고 받다가 연락이 두절 된 상태라고 한다.

 

 

5. 김방일 소대장의 증언 "영화가 사실 그대로를 많이 살렸다."

 

김방일 소대장은 당시 27세로 줄곧 특수부대에서 근무를 하다 684부대로 배속되었다고 한다. 유난히 부대원들이 많이 따랐다고 하는데 영화와는 다른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

사건 전날 교육차 인천으로 교육대장과 나온 그는 복귀를 하던 중 당시 애인(아내 분)과 친척이 잠시 만날 수 있느냐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군인 신분이라 다음에 보자고 했지만 교육대장이 "만나고 내일 복귀하라."라고 해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부대로 복귀하니 초병이 없었고 내무실은 시신과 부서진 집기로 난장판이었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대방동 현장으로 달려가는 설정이지만 실제로는 실미도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시신 수습과 부대 시설을 모두 폭파한 후에 실미도를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부대로 복귀했을 때 "소대장님.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쪽지가 있었다고.

 


원작 소설이나 영화나 모두 얻을 수 있는 정보 내에서, 그리고 최대한 재미와 가상의 설정을 덧붙여 만들었을 것이다. 또한 생존자 분들의 증언 역시 100% 그 날의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 정부와 국가가 소중한 국민 31명의 목숨을 아주 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부대를 만들고 이익에 의해 부대를 소멸시켰던 것이다. 만약 당시 684부대를 월남 파병, 육군 특전대 등으로 남겨두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강력한 특수부대의 등장이 외국이나 북한의 눈치를 볼 일이 아니였음에도 말이다.

당시 대한민국이 얼마나 멍청하고 우매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