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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X파일

유전무죄 무전유죄, 범죄자이지만 웃지 못할 아픔 '지강헌 사건'

1988년 벌어진 희대의 인질극 '지강헌 사건', 범죄자이지만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는 슬픈 사건이었다. / SBS

 

 

오늘 알아 볼 잊혀진 사건은 바로 1988년 일어난 '지강헌 사건'이다.

지강헌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다들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말을 지강헌이 처음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지강헌의 외침으로 다들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이자 사건이었다.

 

물론 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미화하거나 옹호 할 생극은 없다. 하지만 지강헌 사건은 당시 우리 사회가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잘못에 있어 얼마나 불평등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 주목할 만 하다.

지강헌은 당시 전과만 11범에 달할 정도로 평범한 민간인의 신분은 아니였다. 

 

 

 

지강헌 일당의 모습. 지강헌, 안광술, 한의철, 강영일 ( 좌측부터 ) / 엠빅뉴스

 

 

1988년 10월 영등포 교도소에서 대전 공주 교도소로 이송되던 25명 중 12명의 재소자들이 호송 차량을 전복, 탈옥을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 중 대다수는 검거되거나 유흥업소에서 체포되었지만 지강헌, 안광술, 한의철, 강영일은 서울로 잡입, 숙박업소 등을 전전하다가 이내 가정집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4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강영일은 2013년 채널A에 출연, 당시 상황과 출소 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또한 김성진이라는 인물은 "당시 범행 계획은 나와 강영일이 주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애꿎게 사망한 지강헌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라고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누군 장기 복역, 누구는 가석방

 

일단 탈옥이 계획 된 배경은 이러했다. 당시는 1988 서울 올림픽이 폐막한 지 얼마 안된 시기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군림하던 시대였다.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이 배임 횡령 등의 8가지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때 지강헌은 당시 돈 560만원 가량을 절도한 죄로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같이 돈을 훔쳐 징역은 똑같이 선고됐지만 실제 복역은 지강헌이 배로 더하게 된 상황.

무엇보다 전경환은 76억이라는 엄청난 거액이지만 지강헌은 그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560만원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당시 물가를 살펴보면 사실 560만원도 그리 작은 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새우깡이 50원~100원이었고 서울대학 등록금이 12만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서울에서 18평 아파트는 약 1,200만원에 매매할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지강헌이 훔친 돈 역시 당시로서는 절대 적은 금액은 아니였다.

하지만 76억이라는 돈을 훔친 전경환은 3년 뒤 가석방이 되고 560만원을 훔친 지강헌은 징역 7년을 다 채우고도 10년을 더 복역해야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보호감호는 2005년 그 부당성이 인정되어 폐지되었지만 사실 조금은 악법에 가까웠다.

쉽게 말하면 "재범 가능성이 많은 범죄자를 바로 사회로 내보내지 않고 일정 기간을 더 감금, 지켜본다."는 취지의 법이 보호감호이다. 언뜻보면 좋은 취지같지만 작은 잘못에도 오랜 기간을 복역해야 하는 악법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560만원이 적은 금액도 아니고 또 지강헌이 전과 11범이라고는 하지만 560만원에 17년이라는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한다는 건 사실 지나친 처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처벌은 극과 극을 달렸다. / JTBC

 

 

요즘은 인터넷과 언론 매체의 공정성, 투명성이 그나마 보장되어 덜 하지만 1980~90년대만 하더라도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차별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곤 했었다고 한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쌀을 비롯한 식품을 절도했다는 이유로 20년을 복역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당시 한국 사회는 없는 형편의 범죄자들에겐 가혹했다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형이나 동생이나 전씨 형제들은 대체 왜 그러는지 원...

 

 

당시 사건을 보도한 신문 지면

 

 

아무튼 탈주에 성공한 이들은 서울로 이동, 숙박업소 등을 전전하다가 경찰의 포위망과 수사망이 좁혀지자 가정집으로 향하게 된다. 이들은 가정집에 침입해 점거한 후 식사를 제공받고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보통 범죄자들이 인질극을 벌일 경우 난동이나 자해, 성폭행 등의 범죄를 추가로 저지르기도 하지만 이들은 점거한 가정집에 조금의 해코지도 하지 않았으며 존댓말을 사용하는 등 최소한의 예의를 갖췄다고 알려졌다.

 

 

 

공범 중 2명은 자살, 지강헌은 자살시도 후 사망...강영일은 생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집을 포위하고 투항할 것을 권고하자 지강헌은 창문으로 다가와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틀어달라"라고 요구하며 도주할 수 있도록 차량을 가져오라고도 한다.

경찰들은 지강헌을 자극할 경우 인질들이 위험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진입을 시도하지 못하고 계속 투항할 것을 권고하는데 이 과정에서 안광술, 한의철은 더 이상 도주가 불가능하고 검거 될 경우 극형이 불가피한 상황이라 자살을 한다.

이에 지강헌 역시 상황이 좋지 않음을 직감하고 강영일을 시켜 "차량이 도착했는지 보고 오라."라고 하며 그를 밖으로 내보낸다.

 

강영일은 인질 중 한 명을 대동하고 차량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지만 차량은 없었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지강헌이 권총 1발을 발사, " 넌 그냥 가. "라고 말하며 들어오지 못하게 제지한다.

아마도 당시 20세로 젊은 청춘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강헌 자신은 깨진 유리 조각을 들고 목 부위를 찔러 자살을 시도한다.

 

지강헌의 자살 시도로 인해 피가 낭자하자 놀란 피해자가 비명을 질렀고 극단적 방법을 시도한다고 판단한 경찰이 진입, 지강헌에게 총 두 발을 발사하며 제압을 한다. 이후 지강헌은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과다 출혈로 사망한다.

 

 

지강헌, 그는 범죄자였지만 최소한의 양심은 있던 범죄자였던 듯 하다. / SBS

 

 

생존한 일당 강영일은 이후 재판에서 여러 정황이 참작되어 15년이 구형됐지만 점거되었던 가정집 5곳 중 3곳이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 이것이 인정되어 7년으로 감형. 복역 후 출소하게 된다.

피해 가정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들은 절대로 무례하거나 험악하게 굴지 않았다. 꼬박 꼬박 존댓말을 사용했고 예의가 있었다."라며 지강헌 일당을 옹호해주었다.

 

 

당시 유일한 일당 중 유일한 생존자 강영일은 피해자들의 탄원 덕분에 7년형을 선고받았다. / 엠빅뉴스

 

 

| 범죄자지만 비난만 할 수 없던 지강헌 사건

 

지강헌 일당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1980년대의 시대상을 살펴보면 꼭 그들을 비난할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지만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사회는 그들을 보호하고 지원하기 보다는 더 짓밟았던 시대였다.

물론 당시에 초등학교, 중학교만 나오고도 경제활동에 전념, 나름대로 가정을 꾸리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분들도 많았지만 사회의 냉정한 시선과 가혹한 냉대로 비참하고 불투명한 미래에 던져진 사람들도 많았다.

 

같은 죄를 짓고도 누구는 가석방, 누구는 인생의 절반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된다면 과연 그것은 올바른 법의 심판이고 공정한 처벌일까. 범죄자지만 마냥 미워할 수는 없던 범죄자 지강헌.

그가 말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지금도 우리들의 삶에서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볼 때..씁쓸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