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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일이?

우리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지 돌아봐야 할 '1992년 LA 흑인폭동'

1992년 LA 흑인폭동이 잠잠해지고 거리 시위를 하는 한인들, 당시 10만명이 모였다고 한다.

 

 

최근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라는 40대 중반의 흑인 남성이 미네소타주 경찰관에게 목이 눌려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흑인들은 분노했고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뉴스를 접할 수 있었다. 물론 이번에는 해당 경찰관의 과잉 진압과 부적절한 행위가 인정돼 그는 징계는 물론 아내로부터 이혼 소송까지 당하는 등 사태를 진정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지만 미국 내 거주하는 한인들은 또 불안하기만 할 것이다. 해외에서 거주하는 한인들의 경우 대부분이 제조업이나 판매업 등에 종사하기 때문에 약탈의 주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에서 백인과 흑인간의 분쟁이 발생되면 꼭 희생양이 되는 민족이 있는데 바로 "한인"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애꿎은 한인들이 희생을 당한다기 보다는 지역 사회에서 한인들에 대한 인상 자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한번쯤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사실 대체적으로 해외 거주 한인들에 대한 시선이 일본, 중국인에 비해 좋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 1992년 4월 29일. LA 흑인폭동 발생하다

 

1992년 미국 LA에서 발생한 흑인 폭동은 전 세계적으로도 이슈였지만 한국에서도 큰 우려를 나타낸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세계 어느 곳보다 한인들이 많이 이주해 간 국가였고 LA 한인 타운은 그야말로 한국인들의 밀집촌이었다.

미국에 친척 한 두명쯤 둔 한국 가정에서는 그야말로 걱정과 눈물이 끊일 날이 없던 사건이었고 그것은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에 친가와 외가 쪽 친척들이 있었기에 꽤 걱정했던 기억이 있다.

 

LA 흑인폭동은 사실 애꿎은 한인들이 백인들의 방패막이가 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조금 더 내면을 살펴보면 꼭 백인과 흑인간의 문제에 한인이 희생당한 것만은 아니란 걸 알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흑인폭동의 도화선이 된 두 사건. '두순자'사건과 '로드니킹'사건

 

 

먼저 흑인 폭동의 계기는 1991년 3월에 발생한 '로드니킹 과잉 진압 사건'이다. 당시 현대 차를 몰고 과속을 하던 로드니킹이 경찰에 검문을 받게되는 과정에서 이미 전과가 있던 로드니킹이 경찰에게 공격성을 보였던 것이다.

이에 경찰관 4명이 그를 진압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집단 구타가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인근에 있던 흑인 주민이 촬영하게 되고 전후 사정을 모두 자른 채, 언론에 제보를 하면서 불거진다.

결과적으로 4명의 경찰 중 2명은 무죄, 2명은 유죄가 인정되었지만 진행 과정에서 사실상 무죄로 방향이 흘러가자 이에 흑인들이 분노하기 시작한 것.

 

하지만 결정적으로 폭동의 도화선에 불을 지핀 건 '로드니킹 사건' 한달 전에 벌어진 슈퍼마켓 주인 '두순자 흑인소녀 사살 사건'이었다. 당시 10대 중반의 흑인 소녀 라타샤는 모범생에 매주 용돈을 받고 사는 평범한 소녀였다.

일부 언론에서는 라타샤가 주스를 훔치는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사건이라 보도했지만 실상은 라타샤를 절도범으로 오인한 사건이었다.

 

당시 마켓 주인 두순자는 라타샤에게 가방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고 라타샤는 이에 불응하면서 소녀와 주인의 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문제는 당시 라타샤는 주스값을 지불할 현금을 손에 들고 있었지만 흑인에 대한 불신때문인지 주인 두순자는 그것을 보지 못한 것 같다. 결국 소녀는 가게를 나가기 위해 돌아섰지만 격분한 두순자는 소녀에게 권총을 발사, 라타샤가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은 당시 흑인 사회에 커다란 분노를 쌓게 만들었고 한인에 대한 온갖 불만이 증폭되면서 폭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재판 결과 두순자의 정당방위가 인정되면서 한인들은 흑인 사회의 공적이 된다.

 

 

 

당시 예비역들과 LA해병전우회,특전사 전우회 등은 자발적으로 코리아 타운 방어에 나섰었다.

 

 

| "쟤들은 뭔데 군대처럼 움직여?" 놀란 세계 언론, 한국 예비군들의 진면목을 과시하다

 

'로드니킹 사건'으로 분노가 폭발한 흑인들이 처음부터 한인을 공격 목표로 세운 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폭동에 놀란 백인 사회가 한인타운 인근에 위치한 베버리힐즈 등 백인들이 사는 부촌을 방어선으로 구축하자 그 불똥이 한인 타운으로 옮겨진 것이다. LA 한인들의 피해는 심각했다. 가게로 진입한 흑인들의 폭행, 약탈, 방화는 심각했고 한인들은 수년, 십 수년을 알뜰하게 고생해 모은 재산을 한 순간에 날리게 된 것이다.

 

물론 한인들도 격분했다. 사실 백인들의 부촌과 한인타운은 인근이다. 따라서 경찰들이 한인 타운 역시 방어지역으로만 해줬다면 피해는 줄어들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백인 사회는 한인 타운을 버리게 된다.

이에 LA 한인 라디오 방송은 "우리의 재산을 우리가 지키자."라고 방송을 했고 소식을 들은 LA 인근 지역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LA 한인 타운으로 밀집하기 시작했다. 유학생, 주재원, 이민자 등 신분은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예비역과 해병대, 특전사 전우회 등 군필자들이었다.

 

옥상에 모래자루를 쌓고 주차장에 바리게이트를 친 한인들은 경비를 서며 몰려드는 흑인 약탈자들과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 전대미문의 움직임은 곧 미국과 세계의 집중 조명을 받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인들이 군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방어선을 구축하는 모습이 신선했던 것.

더욱이 총을 잘 다루는 모습에 "대체 저들은 뭐지?"라는 의문이 제기됐고 곧 "한국 남성들은 성인이 되면 누구나 군대에 징집돼 군사 훈련과 2년 이상의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물론 한인들은 특별히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위협 사격으로 대응해 특별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본 당시 흑인 사회에서는 "한인 타운 근처에 갔다간 총 맞아 죽기 쉽상이다."라는 공포감이 나돌았고 결국 약탈 대상 지역에서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하나의 여담으로 당시 TV방송국은 한인 타운 옥상에서 경계를 서는 모습을 촬영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아무리 총기 보유가 가능한 미국이라지만 절대로 보유할 수 없는 총기류가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폭동 사태가 진압되고 훗날 경찰은 당시 한인들을 소환해 조사와 불법 총기에 대한 압수를 진행하고자 했는데 알고 보니 실제 총이 아닌 상자나 각종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총이었다고 한다.

실제 당시 한인들은 대부분 권총 뿐이었는데 자칫 무장력이 부족한 것이 드러나면 공격을 당할까봐 일부러 과시하려고 가짜 총을 제작해 진짜인 척 연기를 했던 것이다.

 

 

 

| 한인 가게였지만 흑인들이 나서서 지켜 준 가게

 

당시 흑인들이 오히려 나서서 지켜 준 한인 가게도 있었다. 바로 코리아마마로 불린 故 홍정복씨의 가게였다.

 

 

사실 흑인 사회와 히스패닉계 인종들이 한인 타운을 공격한 건 바로 당시 한인 사회가 보여 준 "차별과 멸시"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LA한인타운 회장도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사실 우리가 이 곳에 건너와 악착같이 살면서 백인 외 인종에 대해 좀 차별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우리도 반성해야 한다."라고 인터뷰를 했다.

그만큼 한인들은 자신들이 겪는 차별과 무시에는 격분하지만 흑인과 다른 인종에 대해서는 차별과 무시를 하는 이중적인 면이 있던 게 사실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두순자 사건'이 도화선이 된 건 맞는 이야기이지만 그 이면에는 그러한 행위들이 전제했고 사실 계기가 되었을 뿐, 언젠가는 터지게 될 갈등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한인들 속에서도 사랑과 친절을 통해 흑인과 히스패닉계 주민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는 한인도 있었다.

바로 1999년 무장 강도에게 희생 당하신 故 홍정복씨였다. 고인은 점포를 운영하면서 가게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늘 환한 미소와 친절로 응대를 했고 분유나 기저귀 값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다음에 여유되면 주세요."라며 어려운 이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또한 물건을 훔친 이들에게도 욕설이나 과격한 언행은 하지 않았다고.

 

어려운 이들과 늘 함께 상생하는 길을 살아 온 고인은 흑인 폭동이 발생돼 공격 대상이 될 것처럼 보였지만 뜻밖의 일이 벌어지게 된다. 바로 인근 흑인들이 자발적으로 고인의 가게로 모여 가게 경비와 약탈자로부터 지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고인을 생전에 -마마-라고 부르며 칭송했고 폭동이 벌어지자 혹 피해를 입을까 자발적으로 모여 가게를 경비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인의 가게는 그 폭동 기간 중에 조금의 약탈,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한인 가게로 기억되었다.

 

여담으로 1999년 무장 강도에게 고인은 피살됐고 이에 격분한 주민들과 지역 갱들은 고인을 추모하는 한편 "반드시 댓가를 지불하게 해드리겠다."며 복수를 다짐했고 결국 강도들은 얼마 후 검거됐다고 한다.

( 오래 된 일이지만 다시 한번 한인들 이미지에 많은 노력을 하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LA흑인폭동은 많은 인명 피해와 자산 피해를 남겼다.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LA는 방위군 투입을 결정했고 이로써 LA흑인폭동 사태도 일단락이 된다.

약 55명이 사망하고 2,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으며 1조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낳은 LA 흑인폭동. 입은 피해에서 30~40%는 한인들이 받은 피해라고 하니 당시 흑인들과 히스패닉계 사회가 백인과 한인에게 갖고 있던 불만이 얼마나 컸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한인들은 다시는 이 같은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 더불어 사는 세상, 평화라는 슬로건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하게 됐고 이때 모인 한인의 수는 10만명이었다.

 

 

 

우리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지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 백인이 하는 인종 차별에는 격분하면서 우리는 똑같이 동남아계를 무시하는 이중적인 모습은 반성해야

 

필자도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지만 여러 나라에서 거주한 경험을 돌아보면 한국인들만큼 이중적인 면을 가진 민족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내가 당하지 않으려고 남을 속이는 행위"가 마치 현명하고 똑똑하다고 느끼는 민족도 한국인이 유일하다. 물론 자본주의의 시대에서 그러한 생각이 아주 틀리고 나쁜 건 아니겠지만 그런 면들이 같은 아시아계이지만 일본, 중국인들에 비해 외국인들에게 비난을 많이 받는 원인이라는 것은 자각해야 한다고 본다.

 

인종 차별은 정말 해서는 안되는 바보같은 행위이다. 하지만 종종 여러 나라의 일부 백인 찌질이들은 황인과 흑인에 대해 많은 차별과 모욕을 주기도 한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는 그런 모욕을 받게 되면 강한 분노와 항의를 하면서 정작 우리는 다른 민족이나 인종에 대해 차별과 무시를 한다는 것이다.

 

필리핀, 베트남, 인도, 미얀마 등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의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우리보다 한 단계 아래의 인간으로 대하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정말 어이가 없던 적이 많았다. 물론 말도 잘 안 통하는 나라에 건너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부를 축적해 자신에게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은 좋지만 어려웠을 때는 잊어버리고 마치 재벌이라도 되는 듯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러다 언젠가 길에서 총 맞아 죽지..."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번 미국 폭동 시위에서 미국 정부가 빠르게 방위군 투입을 결정하면서 다행히 한인 타운은 28년 전의 악몽을 다시 겪지 않아도 되기에 안심이 된다. 고작 100년도 못 사는데 좀 사이좋게 살면 안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