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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국군의 별이 지다 - 백선엽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 별세했다. 향년 100세의 일기.

 

 

우리 나라의 역사를 보면 후세에 그 업적을 인정받는 장군들이 꽤 있다. 그 중 단연 최고는 조선의 수군 제독이자 임진왜란으로부터 무너져가던 나라를 지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당시 군주였던 선조와 조정 대신들에겐 미운 털이 박힌 인물이었지만 후세에는 "다시 없을 위대한 장수"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그 업적을 인정받고 있다.

 

업적을 인정받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근대에도 꽤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일부에서는 매국노로, 일부에서는 나라를 지킨 전쟁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 그리고 당시 참전국 용사들에게도 유명한 인물, 바로 국군 최초의 육군 대장 '백선엽'장군이다.

 

- 본 포스팅은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작성하였으며, 이하 백선엽으로 칭함을 밝힙니다.

 

 

 

1. 군인이 되고 싶었던 백선엽, 일본의 군인이 되다

 

백선엽은 1920년 11월 북한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환경 탓에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잠시 교단에 서기도 했던 그는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들어간다. 1941년 제9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 그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간도특설대 생활이 시작된다. 참고로 간도특설대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일제의 특별 부대로 생각하면 된다.

 

당시 특설대는 부대장은 일본인이었지만 중대장 이하부터는 모두 조선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살기 위해 특설대에 가담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엿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적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만 어떤 면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될 수 있는 요지도 있다고 본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 될 당시 그의 직급은 헌병 중위였다고 한다. / 당시의 헌병은 지금의 헌병이 아닌 정보,기무,특수전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병과였다.

 

 

한국군 최초의 육군 대장이 된 백선엽은 한국전쟁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임은 확실하다.

 

 

2. 독립 후 한국군으로 재편, 한국 전쟁에 장성으로 참전하다

 

독립 후 대한민국에도 국군이 창설되는데 이때 백선엽은 여러 보직을 거치며 중령, 대령 등으로 진급한다. 그리고 1950년 4월 제1사단장에 취임을 한 후 바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51년에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야전군 사령관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52년에 중장으로 진급, 군단장이 된다. 그리고 1953년 한국전쟁 막바지에 대장으로 승진한다.

한국군 최초의 대장이 된 것이다. 이후 계속 군에 몸을 담고 있다가 1960년 예편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다부동 전투에서 그는 부대에서 무단 이탈하는 군인, 그리고 후퇴하는 군인들을 막아서며 "내가 앞장설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한다면 나를 쏴도 좋다."라고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전쟁 고아, 부모 잃은 군인 유자녀들을 모아 백선 유아원을 설립해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지원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고 한다.

 

 

중공군 포로를 심문 중에 있는 백선엽
1세기를 살아 온 그는 한국군대사, 전쟁사의 한 획을 기여한 인물이다.

 

 

3. 간도특설대 당시의 일을 말하기도 한 백선엽, 그의 행위는 분명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가 군인으로써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그가 만주국 일본군 소위로 임관해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그의 인생사이다. 숨기고 싶은 과거이겠지만 숨길 수 없는 과거.

백선엽은 생전 그의 자서전을 작성하면서 이때의 일들을 회고하기도 했다. "당시 특설대엔 많은 한국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인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한국인을 토벌하는 것이니 완전 이이제이 전술을 쓴 일본의 책략이었지."라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한다고 되는 일도, 명령을 배반하고 독립군을 도운다고 독립이 빨라지는 일도 아니였다."고 회고 했다. 더불어 "동포에게 총구를 겨눈 것도 사실이고 그것이 비판받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라며 "당시 민중을 위해서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군인의 사명이라 생각했다."고 언급했다.

 

이것으로 보아 백선엽은 간도특설대 당시 자신의 행위가 반민족적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것에 대해 많은 생각과 어쩌면 추후 후회를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백선엽의 그 당시 행위가 정당화되거나 그러는 건 절대 아니다.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결과론적이긴 해도 독립군 출신들이 한국 전쟁 후 군의 요직에 오른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일제의 군관 출신들이 요직에 앉은 것으로 보아 당시 시대와 사회 흐름이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더 달랐을 수도 있다.

 

 

그의 저서들.

 

 

역사는 산 자의 기록물이라고 한다. 어쩌면 살아남은 일제 군관출신들이 기록을 했을 수도 있고 잘못 된 사실을 이제와 교묘하게 미화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쨋든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로는 그 일제 군관 출신들이 한국 전쟁에서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싸웠고 승리했으며 오늘의 자유주의 국가를 영위하는데 일조했다는 사실이다.

 

막연하게 일본국 소위, 간도특설대에서 활약했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의 100년 인생사를 매도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를 영웅으로 인정하는 사람도, 매국 행위를 한 반역자로 인식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이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간도 행위는 비난하고 한국 전쟁 때의 행위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군인이 된 후 군인으로 명령에 충성했을 뿐이다. 어쩌면 군인으로는 매우 훌륭하다고 볼 수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인간 백선엽과 군인 백선엽을 구분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4. 영광스러운 삶이지만 자유롭지 못했던 삶, 그의 100년 인생사는 힘없는 나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100세의 일기로 그는 생을 마감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글쎄다. 그의 100년 인생을 전쟁도, 나라 뺏긴 설움도 느끼지 못한 우리 세대가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을사오적과도 다르고 조선 말기의 여러 매국노와도 분명 다르다. 매국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군주를 배신하고 변절했지만 백선엽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꿈, 그리고 당시 한창 젊은 나이에 살아 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당시 독립운동가, 독립군을 제외하면 모든 국민이 모두 매국노였다고 볼 수 있다. 한때는 살기 위해 총을 들었고 이후에는 나라를 위해 총을 들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지 않았던가.

 

비난을 할 사람은 비난을 하고 칭송을 할 사람은 칭송을 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지금의 대한민국이 친일파, 매국 행위에 대해 그 무엇도 할 수 없고 할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백선엽의 인생은 나라가 힘이 없을 때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모두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하다.

나라가 힘이 없어 빼앗겼고 나라가 힘이 없어 전쟁을 치뤘고 나라가 힘이 없어 분단됐다.

감히 그 시대를 겪어보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그 누가 그의 인생을 쉽게 재단할 수 있을까.

노장은 이제 긴 전쟁의 삶을 끝내고 영면에 들어갔다. 이제 그의 힘겹고 힘들었던 삶을 가만히 냅두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는 잘못도 했고 잘하기도 했다. 난 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할 것 같다.

 

백선엽 장군님. 그 동안 수고하셨습니다.